백강전투의 현장

백제, 신라, 왜, 당의 군대가 모여 전투를 벌인 백강 전투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구분짓는 국제 해전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전투의 현장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거와 부안 일대의 지리적 특성을 토대로 백강 전투의 현장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아래에서 보듯 백강전투는 동진강 하구 뿐만 아니라 오늘의 동진면과 주산면, 그리고 지금은 육지로 변한 행안면과 상서면 일대의 들판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해안선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으므로 이 글을 읽는 사학도가 있으면 반드시 현장을 답사해 보기를 권한다. 부안의 삼국시대 성지(城址)들은 바다를 통해 쳐들어와 뭍으로 오르려는 것을 막는 성지들과 육로를 통해 내변산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는 성지들의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에는 백산성지와 동진면 일대의 구릉지대에 있는 구지산토성지, 당후리 산성, 창북리 성지, 염창산성, 반곡리 산성 등이 있고 후자에는 사산리 토성지, 부곡리 성지, 소산리 성지 등이 있다.

백산성

▲백산성
▲백산

남접의 서장옥(徐璋玉)이 백산으로 전봉준을 찾아와 단둘이 들판을 바라보며 고부봉기를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다짐하며 한 말이다. 1894년 1월 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과 농민군은 고부군 마항에서 보름 가가이 머문 다음 백산으로 옮겨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고 창의문을 발표하니 인근 고을에서는 물론 전라도 거의 전역에서 농민군 3만여명이 구름처럼 백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죽창을 들고 있어서 서면 흰 옷 입은 농민군들로 온 산이 하얗게 뒤덮여 백산(白山)이 되었고, 앉으면 죽창의 숲이 솟아 죽산(竹山)이 되었다. 부안군 백산면 화호리에 있는 백산은 해발 47미터의 낮은 산이다. 그런데 이 산은 호남평야 한가운데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국으로 홀로 솟아있어 이 곳에 오르면 옛날 군현으로 김제, 만경, 금구, 태인, 정읍, 흥덕, 부안, 고부 등 8개 고을을 고스란히 바라볼 수 있었다.
바로 옆으로는 동진강이 흐르는데 백산 바로 밑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 삼국시대 당시에 백산은 바로 해안가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산은 동진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는 군사적 요새였던 것이다. 소정방이 1,90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쳐들어와 뭍으로 오른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이 백산이었다.
1998년 5월 7일 정부는 백산 성지를 사적 407호로 지정하였다. 이곳은 또한 어망추, 토기 등의 선사시대 유물도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구지산 토성지

구지산은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구지마을의 뒷산으로 해발 20여m의 구릉이다. 이 산은 부안읍의 주산인 상소산에서 서북쪽으로 약 3.5km 거리에 있으며 북으로 2km 거리에 염창산성이 있다. 얼핏 보기에 섬처럼 보이는 이 산은
동으로 당중, 당하마을의 구릉지로 간신히 이어지는데 서쪽으로는 해안선이 언덕 바로 밑에가지 들어와 있었다. 북서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야산 주변을 테뫼식으로 감은 토단성책지가 있다. 남북과 동서의 최대 폭은 300여 m정도이지만 굴곡이 매우 심하여 위부(圍部)의 총 연장은 1,395m나 된다. 남변 중앙에 남문터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으며, 북동쪽의 구석에는 동문터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북서쪽 구석에 북문터가 있는데 이 북문터의 바깥의 우물터에 물이 괴어 있다. 이 물이 고인 곳의 주변에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이 산재해 있었고, 남문 주변에서는 무문토기계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석기류도 채집되었는데 안산암 계통의 석재를 사용한 돌보습 1점과 돌날긁개, 외날돌도끼 등의 타제석기, 마제석검, 숫돌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청호저수지를 건너 석불산을 바라보며 나즈막하게 엎디어 있는 이 토성지 남북으로 해안선이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바다로 돌출한 이곳이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구지(九芝)는 구지화(舊只火)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삼국시대에는 부안이 계화현(界火縣)이었으니 이곳이 바로 기벌포임을 알 수 있다.

당후리 산성

동진면 당상리에 당후 마을이 있고 이곳에서 서족으로 1.5km쯤에 용화동이란 마을이 있다. 이 두 마을을 끼고 있는 해발 15 m 내외의 ㄱ자형 대지를 감사고 있는 토단 성책터가 있다. 이를 당후리 산성이라 한다. 동서의 길이는 약 260m이며 남북의 최대 폭은 100m 정도 이다. 동남쪽의 구석에 남문터가 있다. 1977년 계화도 간척지 취락단지 공사로 대부분 훼손되었다 이 곳에서 서북쪽으로 1.5km쯤에 해발 52m의 염창산이 있다.

창북리 성지

계화면 창북리 창북 마을의 뒷산인 수문산은 해발 30여 미터의 낮은 구릉지이다. 이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에 창북마을이 있고 서남방으로 700여 미터에 염창산이 있다. 산성은 수문산을 테뫼식으로 감은 토성지인데 둘레는 433m, 남북 길이 180m이다. 간척 공사가 있기 전에는 북면이 해안에 접해있었다. 성안에서는 백제의 토기와 석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6km에 계화도가 있으며,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걸어서 섬으로 드나들었다.

염창산성

창북리 성지 서남쪽에 자리잡은 염창산은 해발 52m의 낮은 산이지만 이 일대에선 가장 우뚝 솟은 산이다. 염창산은 국가에 공급하는 소금창고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염창산성은 이 산에 테뫼식으로 토축한 성이다. 동과 서, 북의 드넓은 논으로 보아 이곳은 옛날에는 구지산성지처럼 바다로 돌출된 지형이다. 따라서 군사적 요충지임을 바로 알 수 있게 한다. 이 성은 6.25 동란 때에도 방어선으로 이용되었다 한다.

반곡리 산성

동진강 하구를 동쪽에 두고 있는 반곡리 산성은 부안읍에서 북쪽 문포 방면으로 4.5km쯤 가서 도로변의 서쪽에 있다. 반곡리 마을을 감싸안은 40여 미터의 작은 산이 있는데 이산을 왕개산이라 한다. 이 산봉우리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는 완만한 비탈면을 감은 가늘고 긴 성책터가 있는데 폭은 15m에 불과하고 길이는 300여m이다. 산의 북동면은 급경사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동북쪽으로 동진강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이 반곡 산성에 백제 주력군이 있었고 나당연합군이 동진강 가에 있는 안성리를 점거 대치하였다 한다. 이 반곡 산성에서는 큰 가마솥 10개를 걸고 밥을 지어 군사를 먹였는데 반곡이라는 이름
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성안에서 백제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 볍씨 자국이 있는 토기 한 점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벼농사 시원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하다.

사산리 토성지

사산리 토성지는 주산면 사산리 북쪽에 해발 100여미터의 작은 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은 삿갓을 모양을 하고 있어 입산(笠山)으로 불리는데 사산(蓑山), 도롱이뫼, 또는 뉘역매로 불린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두량이성이 바로 이 사산리 토성이다. 이 유적은 서남쪽으로 가늘고 긴 꼭대기를 평탄하게 다듬고 그 아래의 약 4~5m의 산허리에 성곽을 두른 것인데 지형에 따라 서남 방향으로 타원형을 이루어 장축 100m이며 최대 동서폭은 55m이다. 동쪽은 경사가 급하며 돌로 두덕을 쌓은 흔적이 있고, 서족의 중앙에는 폭 4m의 문터가 남아있다. 또한 내부의 흙을 밖으로 파내어 토루를 쌓은 흔적도 보인다.
이 성은 서쪽 주류성의 동쪽 전초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산으로 들어가는 육로는 이곳을 통하여 유정자(신라군이 진을 치고 머물렀다는 뜻의 留陣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고개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변산에서는 이곳만 지키면 적이 들어올 수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성은 마한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소산리 산성지

도롱이뫼에서 남쪽으로 약 2km 지점에 해발 231m의 주산(舟山)이 있다. 이 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해발 140m의 작은 산의 정상에 테뫼식으로 감은 성책 토성지가 있는데 이것이 소산리(所山里) 산성이다. 북쪽과 서쪽, 남쪽은 산비탈을 깎아 회곽(廻郭)을 두르고 있는데 동면과 서면은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삼한시대의 무문토기와 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이 성은 사산리 토성과 함게 변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산을 지금도 배맷산이라고 하는데 고대에 선박을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부곡리 산성

주산에서 동남쪽으로 2km 떨어진 보안면 부곡리 성산(城山)마을 뒷산에 부곡리 산성이 있다. 해발 74m의 작은 산을 도롱이골로 감은 테뫼형의 이 토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길이는 571m, 내성은 147m이다. 성의 내외에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기와조각과 그릇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시대에 축성하여 고려 때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석마을

부안읍에서 서쪽으로 행안면사무소를 지나 2km쯤 가면 왼편에 해발 100여m쯤 되는 산이 보인다. 이 산 아래 양지진 곳에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행안면 진동리 지석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은 마을을 그냥 `괸돌'이라고도 부른다. 산 중턱에 고인돌 1기가 있어서 불리는 이름이다. 마을 동쪽의 산이 행산이며 산봉우리를 왕가봉이라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이 고창을 시찰하러 가다 이곳에 당도하여 쉬어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왕재산, 또는 시어산(侍御山)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또한 나당연합군의 소정방과 김유신이 주류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백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쳤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말에게 풀과 물을 먹였다는 `군마골'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고, 마을 뒷산을 당나라 군사가 활을 쏘며 싸웠다 해서 호치산(胡峙山)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의 넓은 들은 주산면 주산(배맷산)까지 배가 드나드는 바다였다. 또한 이곳을 백석강(白石江)이라고도 불렀다 하는데 '백석(白石)'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일본서기>에 '일본 수군 500척이 백강에 들어오자 풍장왕(부여풍)이 백촌에 나아가서 일본 원군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백촌이 바로 오늘의 백석리로 추정된다. 주류성과 두량이성을 양 옆에 두고 유정자 고개 밑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는데, 이같은 당시의 해안선으로 미루어 보아 유정자 고개까지 깊숙히 밀고 들어온 만(灣)이 나당과 백제 왜의 연합군이 마지막 해전을 벌인 곳으로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사진은 군마골>

저기(猪基)마을

상서면 가오리 저기마을은 지석마을에서 들판을 건너 맞은 편에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본래 대진(對陣)터였다. 백제가 나당연합군과 싸울 당시 지금은 들판으로 변했지만 백석강을 사이에 두고 나당군과 진을 치고 대치해 있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이 대진터가 돼지터로 와전되어 불리다가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저기(猪基)로 돼버렸다.

조손새암

주산면 사산리에 있는 사산저수지의 물은 나뭇개, 장다리 등의 넓은 들에 물을 대주며 청호저수지로 흘러들어 간다. 사산저수지 안에 조손새암이 있었는데 이 샘에 대한 유래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옛날 삼국시대에 이 곳은 땅은 척박한 데다 조금만 가뭄이 들어도 물을 구하기가 힘들어 사람들의 고통이 컸다. 그래서 어느 할아버지와 그 손자가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달포 가량 파 들어가자 갑자기 물이 터져 올라오기 시작해 금새 커다란 방죽을 이루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하고 방죽 이름을 할아버지와 손자가 팠다 하여 조손새암이라 불렀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주류산성에 있는 백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진을 치고 있던 중 이 조손새암의 물로 수만명의 군사와 말의 식수를 해결했다는 전설도 같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장패들

주산면 사산리 신흥마을 개암사 입구 도로변에 19기의 고인돌이 몰려 있다. 땅에 반쯤 묻혀있는 것도 있고 극히 일부만 모습을 드러낸 것도 있다. 개석은 대부분 1.5~2미터의 소형이며 평평하다.
이는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데 신라 28 장수들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이 일대의 넓은 들판을 지금도 장밭들이라 부른다. 이는 장패들(將敗坪)에서 와전 된 이름으로 장수들이 패배한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편 이곳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개암저수지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보령원이 있다. 김유신이 주류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완전히 평정하자 신라왕은 그에게 이 일대의 땅을 사폐지지(賜弊之地)로 주었다. 이에 대한 비석이 개암사 옆에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유실되어 없어졌고, 이후로 이 일대의 땅은 김유신 후손들의 문중땅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가락기원 1924(1965)년에 후손들이 김유신의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한 곳이 보령원이다.

주류성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뒷산 능선에 있는 이 산성은 백제 때에 쌓은 석축 산성으로 4km 정도의 자취가 완연히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 기록에는 '우금산성(遇金山城)'으로 되어 있는데 근래에 이곳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여 이제 주류성으로 불리고 있다.

성안에는 유서깊은 개암사가 있다. 이 절에 보관되어 있는 개암사지(開巖寺誌)에 따르면 마한의 효왕 28년(기원전 282년)에 변한(卞韓)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여기에 도성을 쌓았다.
이 때 우(禹)와 진(陣)의 두 장수를 보내어 이 일을 감독하게 하고 좌우의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짓게 하여 동은 묘암(妙巖), 서는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하였으니 지금의 개암사는 그 때의 개암동에 자리잡았던 왕궁터라 전해지고 있다. 이후 문왕이 죽자 마연(馬延)이 그 자리를 이어서 30년간 재위에 있으며 잦은 외부의 침략을 막아 평화롭게 살던중 우와 진의 두 장수가 죽은 후 내분이 일어나 마연이 살해되고 마한이 침입하여 변한은 망했다 한다.

▲주류성은 이 묘암골을 둘러싼 석성이다. 따라서 이 골짜기 안이 백제의 피난 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묘암동에는 지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고 돌로 쌓은 산성만 있다. 이 산성을 마연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변한시대에 쌓았는지 백제 때 쌓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변산(卞山-이후 邊山으로 됨)은 여기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개암사 뒤로 난 산길로 산성에 오르면 동으로 두량이성이 지척에 보이고 김제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며, 서쪽으로는 내변산의 군봉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산성 정상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울금바위(우와 진의 두 장수의 이름을 따서 우진암(禹陣巖)이라고도 함)라 하는 이 바위에 굴이 3개 뚫려 있다. 이 굴은 원효대사가 와서 수도를 했던 곳이라 하여 원효굴로도 불리는데, 복신이 거처하던 굴실로 보고 있다. 이 안은 2~300여명이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이다. 이곳을 백제군의 지휘소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12월 3일 개암사에 도둑이 들어 유물을 뒤져 훔쳐가던 중 '별기(別記)'라 이름한 글이 발견되었다. 이는 정유재란 후 개암사를 중수한 후에 개암사 중수기를 쓴 4명 중 한 명인 밀영이라는 스님이 쓴 것이다. 이를 옮겨 쓰면 다음과 같다.

이 기록은 원효방의 상량문을 빌어 옮긴 것으로서 싸움이 끝난 지 13년 후인 병자년에 백제 유민의 민심을 수습할 목적으로 이 곳에 절을 세웠다는 것을 알리는 기록이다. 그 해 병자년은 신라가 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비로소 통일의 완성을 본 해이며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연 해이기도 하다. 위 기록에서 왜병이 백강 오른쪽 언덕에 진을 쳤다 했는데 이곳이 바로 '대진터', '돼지터'로 불리다가 지금은 '저기'로 이름이 바뀐 곳이다.

나뭇개

▲배맷돌

저기 마을 옆에 나뭇개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옛날에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는데 일제가 수리사업을 하면서 멀리 바다 쪽의 개를 막고 수문을 달아 이 일대의 바다를 논으로 만들고부터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이 수문을 지나 상류 쪽으로 난 개울은 지금 농수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때의 백강이다.이 수문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십여리 떨어진 곳에 계화도가 있다. 썰물 때면 그곳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다 한다. 이 개펄이 바로 기벌포가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기상 조건을 무시한 채 싸움을 걸었다고 한 것과 배를 돌릴 수가 없어 패했다고 한 것은 싸움 중에 썰물을 만나 배가 손발이 묶이게 된 사정을 두고 한스러워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조수가 드나들던 갯벌은 두포천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