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은 어디인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이 거느리고 온 당군에 협격을 당한 백제는 마침내 660년 7월 13일 사비도성이 함락됐고 공주로 탈출했던 의자왕도 사비도성 함락 후 엿새만에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9월 3일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대신들, 그리고 일반 백성 등 1만 2,807명을 압송하여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여기서 백제가 망한 것이 아니었다. 항복의 대열에서 탈출한 흑치상지가 임존성(오늘의 충남 예산)에서 항전의 횃불을 올리자 열흘만에 3만여명의 의병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후 항전의 불길은 삽시간에 백제 전역으로 번져갔다. 이후 3년 동안 나당군과의 처절한 전투가 지속되는데 이를 '백제부흥운동'이라 하고 있다. 무왕의 조카이며 의자왕과는 사촌인 부여복신(扶餘福神)과 승려 출신인 도침(道琛)등은 일본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모셔와 왕으로 옹립하고 주류성을 피난 정부의 도읍지로 삼아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며 고구려, 일본과 연계하여 신라와 당에 맞서 3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백제는 한때 신라가 총력을 기울인 두량이성 진공작전을 격파하고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으며, 사비성에 고립된 당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했다. 그러나 663년 백강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마지막 왕성이었던 주류성마저 함락당하여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풍왕은 고구려로 몸을 피하고 잔여세력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 때의 모습을 <일본서기(日本書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월 신해가 초하루인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州柔)성이 비로소 당에 함락되었다. 이 때에 나라 사람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가 있겠는가. 다만 저례성(저禮城)에 가서 일본 장군들을 만나 사건의 기밀한 바를 논의하자.'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본래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있는 처자들을 가르쳐 나라를 떠날 생각을 알리게 하였다. 신유(11일)에는 모저(牟저)를 출발, 계해(13일)에 저례에 이르렀다. 갑술(24일)에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餘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憶禮福留)는 백성들과 함께 저례성에 이르렀다. 이튿날 배가 처음으로 일본을 향해 떠났다." (<일본서기> 권 27, 천지2년 9월조)
그런데 백강과 주류성의 위치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왔다. 이병도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의 주류성설 및 금강 하류의 백강설과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의 부안 우금산성의 주류성설 및 곰소만의 백강설이 대립해오다 최근 향토사학자 박성흥씨는 충남 홍성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9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주류성의 위치는 현 충남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산성리~광성리 일대라고 주장하였다. 박씨는 홍성 근거설을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 권5에서 제시하였다. 김정호는 대동지지 홍주목조(洪州牧條)에서 "洪州牧 本百濟周留城唐改之 州(홍주목은 본래 백제의 주류성이었는데 당이 이를 심주라 고쳤다.)"라고 하였고 공주목조(公州牧條)에서는 "王(文武)領 金庾信等二十八將軍 與之合功 豆陵尹城(今定山) 周留城(今洪州)等 皆下也(문무왕이 명령을 내려 김유신 등 28장군으로 하여금 함께 두량이성과 주류성을 공격하도록 하여 이를 다 굴복시켰다.)"라고 구체적으로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동경대 이케우치 교수의 충남 서천군 길산천 부근의 구릉설과 연기군의 전의 지방설도 있다. 백제, 신라, 당, 일본의 4개국이 참여하여 3년 동안 벌인 전쟁의 현장임에도 이렇듯 그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들이 <구당서>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그 뒤로 망했으므로 자신이 쓴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자가 우리 땅의 지리나 지명을 정확히 파악하고 기록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조차 이 크나큰 사건을 지나치게 축소, 왜곡하여 기록하였다. 3년간의 이 전쟁을 잔적들의 소요쯤으로 보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부실한 사료들만을 근거로 견강부회하여 주장함으로써 주류성과 백강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최근 원광대학교 전영래 교수와 한양대학교 이도학 교수, 부안의 향토사학자 등이 부안의 우금산성과 동진강설을 주장하며 부안설이 차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부안설을 바탕으로 현장에 남아 있는 전설과 옛지명 등을 고찰하여 기벌포 주류성 두량이성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당시의 해안선을 도출해내어 백강 전투의 현장을 새롭게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