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존성과 흑치상지

▲임존성 자락인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 있는 도침과 복신장군을 모신 사당.

8월 2일 사비성에서는 나당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서부 세력을 거느리고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 전승축하연 이후 사비성을 탈출하여 1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위치 미상)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남경대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묘비명에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씨(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의 선조는 백제의 식민지였던 흑치국의 총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남부 월(越)에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치국의 위치를 중국의 남부로 추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필리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섰다가 왜 이탈하여 부흥운동의 기치를 들게 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하다.
웅진성으로 도피해 있던 의자왕이 항복한 것은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된 후 5일이 지난 7월 18일이었다. 그것도 웅진방의 영군을 데리고 웅진으로부터 와서 항복한 것이었다. 이에 흑치상지를 비롯한 여러 지방 성주들의 동참이 뒤따랐다. 이는 백제와 당나라 사이에 어떤 타협이 성사되었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기 전에 백제는 상좌평을 시켜 많은 음식을 보냈는데 소정방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왕의 서자가 6명의 좌평과 더불어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이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에 나서게 된 동기가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전>"는 데 있었음을 고려하면 당군이 의자왕을 포로 취급을 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랐음을 말해준다.

은산별신제

임존성 부근의 충남부여로 은사면 은산리에서는 지금도 백제 부흥군 도침과 복신을 사당에 모시고 제사(은산별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은산 별신제(恩山 別神祭)는 토속 신앙에 군대 의식이 가미된 충남 지역의 대표적인 별신제로 장군제(將軍祭)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위령하여 그 음덕으로 질병을 퇴치하고 마을의 평안을 얻었다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별신당 정면에는 산신(山神)을, 동쪽에는 토진(土進)대사, 서쪽에는 복신(福信)장군의 영정(影幀)을 모셨는데 토진(도침)대사와 복신장군은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도침과 복신장군을 모신 사당앞 안내판에 새겨놓은 복신 장군상.

임존성(任存城)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해발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석축산성으로 험절함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이 3곳이 있었다. 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가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백제의 의병들은 남잠성과 정현성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자 당은 백제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듯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4면을 돌아가며 서둘러 글자를 새겼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제목의 이 글로 인해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이 백제를 멸하고 나서 세운 전승기념탑으로 오해되어 해방 후 허물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8월 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뜨리고 물러섰다.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 임존성은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최후까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