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벌포와 백강
이제 문제는 기벌포와 백강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기벌포는 지금까지 금강하구의 장항이라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장항읍에는 장암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기벌포와 백강을 같은 장소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의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조에서는 기벌포를 '장암 또는 손량, 다른 한편으로는 지화포 또는 백강(卽長 ,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이라고 하였으며, 백강을 기벌포(白江 卽伎伐浦)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백강을 백마강으로 오해하여 부여 부근의 금강변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1,900여척의 대선단이 좁은 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없음을 생각하면 기벌포와 백강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다음 <구당서(舊唐書)>의 백강전투에 관한 기록 역시 오늘의 금강 하구를 별도로 웅진강구라고 하고 있다.
이 때에 인시 인원과 신라왕 범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두상 부여융은 수군과 식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으로부터 나와 백강 입구로 가서 육군을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추격하였다. 왜인을 백강 입구에서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가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붉게 물들었다.
- <구당서> 백제전
삼국시대에 부안은 개화(皆火)현이었다. 또한 계발(戒發)로도 불리웠는데 이는 개부리', '개불'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에 '~夫里'로 끝나는 지명이 많이 나타남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반도 남쪽에 남방계의 이주민이 와서 정착했음을 알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즉 '개부리>개불>戒發>伎伐>皆火'로 명칭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계화도(界火島)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계화도는 썰물 때면 개펄이 드러나 걸어서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1970년대에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육지로 된 곳이다. 지금도 이곳 촌로들은 '개화도(皆火島)', '지화도(只火島)'라 부르고 있다. 또한 계화도에는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버들자리를 펴 개펄을 헤치고 상륙했다고 하였는데 이곳에서 당군은 버드나무를 베어 나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해안선이 오늘과는 아주 달랐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음 지도는 현지 답사를 통해 당시의 해안선을 추정한 것이다. 이 지역의 해안선은 삼국시대 이래 계속되는 간척사업에 의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왼쪽 지도에서 보면 동진강 만경강 금강 그리고 부안군 주산면으로 깊숙히 들어간 만(灣)을 한 눈에 바라보는 중심에 계화도가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통과하여 내륙 깊숙히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산의 월고리 봉수대와 고부 두승산의 봉수대는 이곳으로 연결된다.
한편 <구당서> 열전 소정방 편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 웅진강구에 이르니 백제군이 지키고 있으므로 정방은 동안(東岸)으로 올라와서 산위에 진을 치고 백제군을 역격(逆擊)하였다. 수군들이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뒤를 이어 들이닥치니 수천명의 백제군이 죽고 흩어지므로 정방은 안상에서 지키며 수륙 양면으로 왕도로 향하였다.
이는 웅진강(지금의 금강)이 아닌 다른 곳에 먼저 상륙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수륙 양면으로 사비성을 향해 진격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지명이 부안읍에 있는 상소산(上蘇山)이다. 해발 70m의 이 산은 부안읍의 진산으로서 소정방이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여기서 당시의 지형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오늘의 부안군 주산면 쪽으로 깊숙히 들어온 좁은 만의 동쪽에 상소산이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곳은 지금 부안군 행안면의 들판으로 변해 있으나 최근까지 조수가 드나들던 곳이었다. 위에서 '동안(東岸)'이라 함은 바로 이 만의 동쪽임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6월 21일에 덕물도에서 소정방이 신라 태자 법민을 만나고, 당군이 7월 9일 웅진강구로 들어섰다고 했는데 1,900여척에 탄 13만 대군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 덕적도에서 금강(웅진강구)에 오기까지 20여일 동안 함상에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6월 하순에 기벌포(오늘의 부안)에 당도하여 동진강과 변산반도 좌우의 내해로 들어와 동시다발적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것이다. 곰소만을 통해 상륙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 또한 틀린 주장은 아닌 것이다.
대규모 병력이 조수 간만의 차가 큰 기벌포 일대를 통해 상륙을 하려면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시일을 택해야 할 것이다. 당군이 상륙한 7월 8, 9일 무렵은 무심이라 하여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시기이다.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하기로 한 날짜를 10일로 한 것도 이점을 고려하여 날을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뭍에 오르려는 당군과의 전투를 짐작케 하는 전설이 있다. 부안군 동진면 안성리 반곡마을에는 이 마을을 소쿠리 속처럼 감싸고 있는 높이 40미터의 왕개산이 있다. 이 산에 오르면 동북쪽으로 동진강 하구의 질펀한 개펄이 한눈에 들어와 동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는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산성은 산봉우리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는 300여미터의 토성책과 동편으로 산허리를 감는 700여미터의 긴 토단으로 되어 있다. 이 토성에 백제군이 주둔하며 지키고 있었으며 당군은 안성리를 점거하여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다 한다. 이 때 백제 군사들은 큰 가마솥 열 개를 걸어 밥을 해서 수천명의 군사가 먹었는데 이에서 반곡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반곡리 산성 외에도 이 일대에는 구지산 토성지, 당후리 산성, 역리 성지, 창북리 성지, 염창산성, 백산성지 등의 백제시대 토성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