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숲’이 된 덕림초등학교의 오랜 기억

  주산면에는 주산초등학교와 덕림초(주산면 덕림리 487-3), 석계초(주산면 백석리 579-7), 그리고 동정초(주산면 동정리 388)가 있었지만 현재는 주산초등학교만 남아 있고 나머지 학교들은 폐교가 되어 부지만 덜렁 남아 있다. 폐교된 덕림초등학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나 쉽지 않았다. 부안군지 및 40여 년 전에 발간된 옛 자료(부안 얼-1986) 등에서 덕림의 연혁을 찾고 졸업생과의 대화를 통해 이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숲이 울창했다던 덕림(德林)에 생긴 국민학교 덕림리(德林里)는 숲이 울창했으므로 덕림(德林)이라 했다. 덕림 주변 마을 아이들은 주산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주산국민학교는 학생 수 과밀화(1957년 1817명, 1958년 1959명, 1959년 1905명)가 …

고루살이를 꿈꾼 석정의 삶과 문학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1년 늦가을 무렵으로 기억된다. 전주시 고교학생반공웅변대회에서 한 학생이 해방 직후 북한 주민들이 젊은 유격대장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며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을 말하는 과정에서,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두 팔을 들어 올리고 큰 소리로 ‘김일성 장군 만세! 만세!’하고 외친 것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그 학생은 가짜 김일성에 평양 시민이 속았다는 것을 이어서 말하려 한 것인데, 그 부분에서 중단이 되고 대회장은 금세 얼어붙었다고 한다. 이를 빌미로 당시 전주상고에 근무 중인 신석정 선생이 배후 조종자로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귓속말로 …

[부안의 설화] 보안 선돌과 장자못 설화-“중의 바랑 속에 두엄을 가득 넣어…”

  보안면 상입석리 뒤 언덕에는 욕심 많은 사람을 징계한다는 교훈적인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높이 2.7m쯤 되는 돌(선돌, 立石)이 서 있다. 그러한 여유로 마을 이름도 입석리(立石里)이다. 지금부터 1100년여 년 전 신라 51대 진성여왕 무렵에 이 입석리에서 동쪽으로 4km쯤 되는 장자터 마을에 욕심 많고 인색한 큰 부자가 살았는데 너무나 나쁜 짓만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름하게 생긴 중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는 염불을 하니 욕심꾸러기 그 부자 영감이 중의 바랑 속에 두엄을 가득 넣어 주었다. 고맙다고 염불을 외우며 …

“물맛이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원효방의 유천(乳泉)과 변산의 차(茶)문화

  원효방 유천(乳泉) 개암사 뒷산이 이고 있는 울금바위에는 남. 북. 서 세 곳에 굴실이 있다. 북쪽의 굴실은 세 곳 중 가장 협소하며 백제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해서 베틀굴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서쪽의 굴실은 세 곳 중 가장 큰 굴로 역시 백제부흥운동 당시 복신이 거처한 굴이라 하여 일명 복신굴이라고 불리고 있다. 남쪽의 굴실은 바위절벽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에서 10여 미터나 되는 암벽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곳이다. 굴실의 크기는 6∼7평정도이고, 이 굴실 바로 옆에는 마치 칸막이를 해놓은 …

“중이 죽은 벼랑 ‘중중다랑'”-계화도 장자울 중중다랑과 약수터

  계화산 서남쪽으로 살끄미를 지나 장자울 고개를 넘으면 비안도 고군산열도가 발 아래 보이는 절벽이 나오는데 이 절벽에 중중다랑이 있고 이 중중다랑 밑에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는 그 효험이 매우 신통하여 불치의 병에도 약이 됨은 물론 아이를 못하는 여인이 마시면 아이도 낳는다는 약수인데 조수가 많을 때는 약수가 바닷물에 잠긴다. 약수터 위의 층층한 절벽을 ‘중중다랑’이라 부르는데 이 절벽의 난간에 앵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예쁜 앵두가 많이 열린다. 옛날 어떤 중이 이곳을 지나다가 때마침 먹음직스러운 앵두가 많이 열렸으므로 위험한 절벽의 난간을 의지하여 지팡이로 …

[부안의 설화]거석리와 여장사-“여장사가 돌을 들어다 놓았다 하여 ‘들독거리'”

  내변산 청림 삼거리에서 바디재 쪽으로 가다보면 노적마을 지나 마을이 하나 더 나오는데 이 마을이 바로 상서면 청림리 ‘거석’마을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이 마을은 돌과 관계가 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바디재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하고도 우람한 남근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부안의 모 향토사학자는 “바디재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거석(巨石, 일명 남근석이라고도 일부 주민은 부르고 있음)이 우뚝 서 있다.”고 그의 변산여행안내 책자에 소개했는데, 그 바위가 정말 세계에서 제일 큰 거석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어느 지역에나 남근바위가 있어 소개가 많이 됐는데, 거석 …

[부안의 설화] 벽송대사와 그의 어머니-호남의 명당 ‘無子孫香火千年之地’를 찾아서

  부안에는 벽송대사에 관한 두 편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환의고개’, 또 하나는 ‘無子孫香火千年之地’ 설화이다. 환의(換衣)고개 일명 지응대사(紙鷹大師)라고도 불리는 벽송은 출가하여 내소사에서 청련암 가는 중간쯤에 벽송암(碧松庵)을 짓고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출가해 버리자 어머니는 벽송에게 귀가할 것을 권하지만 이미 불도에 깊이 귀의한 벽송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작별하면서 한 가지 굳은 약속을 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초하루와 보름, 오늘 작별하는 이 고개에서 만나기로… 아무리 어머니이지만 수도승이 지켜야하는 淸戒의 영역 안에는 부녀자가 들어갈 수 없으므로 …

[부안의 설화]뉘역메와 거적골-“산 모양이 도롱이로 둘러 놓은 노적가리 같다”

  주산면사무소가 있는 종산(鐘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1km쯤 가면 뉘역메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뒤의 산 모양이 마치 도롱이로 둘러 놓은 노적가리 같다 하여 뉘역메, 혹은 도롱이 산(蓑山)이라 했는데 지금은 쉽게 사산(士山)으로 쓰고 있다. 이 사산에는 백제시대의 고성으로 추정되는 테머리형의 토성터가 남아 있는데 이 성과 개암사 뒷산에 있는 주류성에서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싸움을 한 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사산 옆에 정소산(定蘇山)이라는 얕으막한 야산이 있는데 그때 당시 소정방과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만나 승전을 즐기며 놀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옛날에 이 뉘역메 마을 앞에 강이 가로질러 흘렀으며 마을에는 …

[부안의 설화] 동진나루 이야기-“야 이놈아! 나도 멀쩡한 부안김가다”

  지금의 동진대교가 있기 전에는 그 자리에 나루가 있어 배로 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 나루가 바로 부안 대표적 나루로 이 나룻터에는 뱃사공이 나룻배와 더불어 연중 대기하고 있다가 길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해왔다. 그들은 세습하여 뱃사공 노릇을 하였는데 정기적, 항시적으로 이용하는 주민들이 거두어 주는 뱃새경과 외지인들에게서 받는 선임(船賃)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뱃새경은 이용하는 횟수에 관계없이 근처 주민들은 한 가구당 1년에 보리 1말, 또는 5되씩 2회에 걸쳐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특례가 있어 지방의 관원이나 양반에게는 뱃새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관원이나 양반들을 일일이 다 …

[부안의 설화] 계화도의 유래-“돌부처 콧구멍에서 피가 나면 쏘(沼)가 될 것이다”

    계화도界火島는 계화도간척공사로 지금은 육지가 되었지만 1968年 이전에는 서해바다의 외로운 섬이었다. 주봉인 매봉은 해발 265cm 높이인데 옛날의 통신수단인 봉수대 자리가 남아 있으며 조선조말의 큰 학자였던 田愚先生이 말년을 이곳에 숨어 살며 3천여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아주 먼 옛날에 계화도가 육지에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계화산의 한쪽 모퉁이에 돌부처 하나가 서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과객이 지나가다가 그 돌부처를 보고 「이 돌부처 콧구멍에서 피가 나면 이곳이 모두 쏘(沼)가 될 것이다.」 하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별 미친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