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거병과 기벌포 상륙작전

의자왕 16년(서기656년), 백제의 상좌평이었던 부여성충(扶餘成忠)은 옥중에서 마지막 충언을 올리고 죽었다. 그는 신라와 당의 침입을 예견하고 '육로로 쳐들어오는 군사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해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십시오(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라고 하였다.
659년(태종 무열왕 6년)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또다시 원병을 청하자 660년 3월 당의 고종은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을 삼고 당에 가있던 무열왕의 왕자 김인문을 부대총관을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당의 최정예군사들인 이들은 산동성의 협주(莢州:오늘의 掖縣)를 출발하여 1,9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6월에 덕물도(오늘의 덕적도. 덕적도의 소야(蘇爺)반도는 소정방이 진을 친데서 나온 이름이다.)에 도착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5월 26일 유신, 천존, 진주 등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오늘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태자 김법민(후일 문무왕)으로 하여금 병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가서 소정방을 영접토록 하였다.
6월 21일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김법민이 백제를 칠 작전을 세웠다. 여기서 당과 신라는 동시에 백제를 협격하여 백제의 1차 방어를 물리친 뒤 합세하여 사비도성으로 진격키로 하였다. 즉 당의 수군은 기벌포로 상륙하고 신라는 탄현을 넘어 7월 10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신라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으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진격토록 하고 자신은 금돌성(지금의 경북 상주 백화산)에 머물렀다.

▲동진강 하구 갯벌_당의 13만 대군은 동진강 하구와 계화도를 통하여 뭍에 올랐다.

덕물도에서 휴식을 취한 당군은 성충의 예언대로 기벌포로 향했고, 김유신, 김품일, 김흠순(김유신의 동생)등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탄현으로 진격하였다. 그제서야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좌평 의직이 "당병은 멀리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처음 육지에 내려서 사기가 정정치 못할 때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인은 대국의 도움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인이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날쌔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인과 먼저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달솔 상영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병은 멀리서 와서 속전할 의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이요, 신라인은 앞서 아군에게 여러 번 패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 병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오늘의 계획은 당인의 길을 막아 그 군사의 피로함을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은 후에 적당한 때를 엿보아 합전(合戰)하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당과 신라가 수로와 육로로 협격해 들어오자 의자왕은 귀양가있던 흥수에게 계책을 물었으나 원론적인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흥수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명하여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기각의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원광야에서 대적하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 함)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 함)은 아국의 요로입니다. 일부단창을 만인도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사를 가려서 가 지키게 하여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白江(或云 伎伐浦) 炭峴(或云 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라고 했다."

▲계화도_지금 논이 된 곳은 60년대의 계화도 간척사업 전만 해도 바다였다. 당군은 이 일대의 진흙뻘을 통과하여 사비성으로 진격하였다. 결국 진흙뻘의 통과를 막지 못한 백제는 흥수의 우려대로 평원광야에서 적군을 맞아들이고 말았다.

백제는 군사를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계백의 5천 군사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맞아 4차례를 이겼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의직은 개펄을 헤치고 기벌포를 통과하여 뭍으로 올라온 당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지만 이미 지리적 요충지를 통과한 당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의직은 이미 언덕으로 올라온 당군을 맞아 격전을 치렀지만 이미 진흙뻘을 지나와 사기가 오른 당군의 수효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보자.

당과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거쳤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아가 신라병과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회전에 모두 이겼으나 병력이 적고 힘이 꺾여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구(雄津江口)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수케 하였다. 정방이 좌편 해안으로 나와 산에 올라 진을 치니 아군이 싸워 대패하였다. 聞唐羅兵 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江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與之戰 我軍大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

위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면 당군이 백강을 이미 통과 했음을 보고 웅진강구(오늘의 금강 입구)를 지켰으므로 백강은 금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는 웅진강구에 백제군이 있음을 보고 다른 곳으로 상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군의 기벌포 상륙의 어려움을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군 소정방, 김인문 등이 연해안을 따라 기벌포로 들어왔는데 해안이 진흙탕이어서 빠지므로 다닐 수 없었으므로 버들자리를 펴 군사들을 나오게 하였다.(將軍蘇定方 金仁問等沿海入依(依當作技)伐浦 海岸泥 陷不可行 乃布柳席以出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