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
부여복신 등이 이끄는 백제군의 공격으로 당군이 위기에 처하자 신라왕 김춘추는 당군의 구원 요청에 따라 총력을 다하여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주력부대가 있는 주류성으로 향했다. 명분은 사비성의 구원에 있었으나 목표는 백제군의 근거지이자 피난 정부의 도읍지인 주류성이었다. 신라군의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위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고찰해보기로 하자. 이병도 박사는 '고사비성(古沙比城)'을 김제군 진봉면의 '고사리(古沙里)'라 하였는데 원광대 전영래 교수는 오늘의 고부(古阜)임을 밝혔다. <삼국사기> 지리편에도 '古阜郡 本 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 改名今因之...(고부군은 본래 고사부리군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라는 기사가 있다. 문제는 여기서도 두량이성의 위치에 있다. 신라의 출병이 고립에 빠진 사비성의 당군을 구원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학자들은 부여 근처에서 비슷한 지명을 찾아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두량윤성(또는 두량이성)은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 그 지명과 함께 남아있다. 주산면 사산리 사산마을 뒤에 해발 100여미터의 있다. 이 산은 도롱이뫼, 사산(蓑山), 또는 뉘역매로도 불린다. 이 산 정상에 토루(土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백제군이 천험의 요새를 지키며 시간을 끌자 나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사산에 이엉을 엮어서 낟가리처럼 쌓아놓고 군량미를 많이 쌓아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남아있다. '뉘역매'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한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신라군은 고사비성에 진을 치고 고부천을 중간에 둔 채 7km 떨어진 두량이성을 36일동안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이 또 하나 있다. 주산면 사산리 산돌마을 동쪽을 맷돌리라고 부른다. 백제군이 이 마을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마을 뒷산에 보리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쌓아 노적가리인 양 위장을 해놓고 산 밑에서는 큰 맷돌을 돌려 이 소리가 멀리 들리게 하여 군량미가 충분하고 병사도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백제군이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신라가 총력전을 편 두량이성 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곤경에 처한 당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대병을 출병시켜 백제의 근거지를 선점하여 당군의 기세까지 꺾어 백제 영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김춘추의 전략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식량 때문으로 보인다. 3, 4월의 춘궁기에 깊숙히 대군을 침투시키는 것은 무모한 작전이었다. 설인귀에 답하는 문무왕의 글에 당시 두량이성 전투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이르러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수도인 사비성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립된 유인원 등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복신은, "대사(大使)들이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지, 마당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겠노라."고 조롱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러나 눈앞의 성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었다.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복신이 도침을 처형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까지 부흥운동은 복신과 도침의 두 세력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승려 도침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서 사원 세력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미륵사는 2천여명의 승려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 하는데 이 승려들의 집단은 유사시에 군사적 조직으로 바뀔 수 있었다. 도성이 함락되자 도침은 이들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독자적으로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복신과 연합하였던 것이다.
지휘 체계가 이분화 되어 일사분란한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느끼던 복신이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를 이끌고 주도권을 장악하자 도침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의 모든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