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고구려 침공

 

백제가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을 때 백제의 동맹국이었던 고구려는 왜 백제를 돕지 않았을까. 그것은 연개소문 사후 연이은 당의 침공을 막아내느라 군사를 둘로 나누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력 또한 크게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666)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에 연개소문의 죽은 해가 건봉 원년(666년)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는 이 기록을 따랐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백제가 망하기 전일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이를 명확히 밝힐 수가 있었다. 그것은 연개소문의 장자 천남생의 묘지(墓誌)가 발견된 데서 비롯되었다.

천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막리지에 올랐다. 이후 두 동생인 남산, 남건과의 권력싸움에 밀려 당에 망명했다가 당이 고구려를 칠 때 앞장서 향도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죽어서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는데 그의 묘지가 출토된 것이다. 그 묘지에 연개소문이 언제 죽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남생이 24세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며 의봉4년 정월에 46세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의봉4년은 679년이므로 남생이 막리지가 된해는 657년이다. 따라서 이 해를 연개소문이 죽은 해로 보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있는 동안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던 당은 그가 죽자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657년 5월에 당의 정명진 등이 요하를 건너 내침해 오자 고구려는 귀단수를 건너 당을 맞아 싸웠으나 1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658년에는 정명진과 설인귀가 쳐들어와 이를 물리쳤으며, 659년에 다시 설인귀가 쳐들어왔으나 온사문이 횡산에서 이를 맞아 물리쳤다.
남생의 묘지에 의하면 '9살 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 衣先人)의 한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선임으로 낭관이 되어 중리대형, 중리위두대형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24세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남생은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초기에는 당의 집요한 공격을 잘 격퇴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10년 연장하였다고 신채호는 주장하고 있다.

신라에서 김춘추가 왕에 즉위하여 태자 법민을 당에 보내 백제의 사정을 말하고 청병을 하자 당의 임금은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신라와 함께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킨 당은 이 해 11월 총력을 기울여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설필하력이 패강도행군도총관, 소정방이 요동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이 평양도행군대총관, 정명진이 누방도행군대총관이 되어 각자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향했다. 661년 정월에는 하남, 하북, 회남 등의 67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4만4천여명이 고구려 공격에 가담하였으며, 4월에는 다시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설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35군으로 더불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진군케 하였다. 당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려고 하자 울주자사 이군구가 간하기를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을 기울여뜨릴 수 있으리까. 만일 고구려가 이미 멸망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지켜야 합니다. 적게 보내면 위엄을 떨치지 못하고 많이 보내면 인심이 불안하니 이는 운반과 방수에 피로하다는 것입니다. 신은 원정함은 원정치 않음만 같지 못하고 멸망은 멸망치 않음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측천무후도 이와 같이 간하므로 마침내 당고종은 이에 따랐다.

이처럼 서쪽에서 당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고구려를 내침할 기회만 엿보고 있으니 고구려는 함부로 군사를 나누어 백제를 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마침내 백제를 돕기 위해 출병을 하였다. 661년 5월 9일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오늘의 여주)으로 쳐들어 왔다. 신라군이 이를 막아내자 고구려군은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함락시키지 못하고 20여일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6월에 김춘추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김법민(문무왕)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