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 요새지로서의 변산

 

동 개골(皆骨) 서 구월(九月), 남 지리(智異) 북 향산(香山), 육로 천리 수로 천리 이 천리 들어가니, 탐라국이 생기려고 한라산이 둘러있다. 정읍 내장(內臟) 장성 입암(笠岩) 고창 반등(半登) 고부 두승(斗升), 서해 수구(水口) 막으려고 부안 변산(邊山) 둘러있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산타령의 대목이다. 부안의 계화도 앞 바다에서는 동진강, 만경강, 금강 등의 물이 만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곳은 백제의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고대 국가의 부의 창출 수단으로서의 농토와 농민을 호남 평야의 경략에서 찾았다. 무녕왕(재위 501~523) 대에 이미 국력을 회복한 백제는 무왕(재위 600~641) 때에는 오늘의 익산시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에 제2의 수도를 건설하였다. 협소한 사비성에서 벗어나 넓은 평지에 웅도를 건설하여 해외 진출에 주력하고 신라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원활히 공급하고자 함이었다.

▲변산 제1봉인 의상봉에서 바라본 변산군봉

이에 연관시켜 보면 변산은 백제의 관문을 지키는 지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최고봉인 의상봉(509m)을 중심으로 한 변산의 산뭉치는 백두대간과는 연결이 없는 이른바 평지돌출형의 산으로 섬이 되는 것을 겨우 면하였다. 해발 50여 미터의 유정자 고개가 호남평야의 육지와 간신히 연결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 유정자 고개만 막으면 변산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천연의 요새지가 되고 있다.
내변산의 모든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은 백천내를 이루어 고군산군도를 바라보는 해창으로 빠져나간다. 해창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석문동(石門洞)이 나오는데 이곳엔 실제로 돌로 만든 문이 있었다 한다. 현재 이곳엔 부안댐이 들어서 있다. 그 안으로 투구봉, 장군봉, 노적봉 등의 봉우리들과 군막동(軍幕洞), 마상치(馬上峙), 깃대봉 등의 지명은 군대와 관련된 지명들로서 이곳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장소였음을 추정케 한다.

▲죽막동 제사유적이 발굴된 변산반도의 서쪽 끝 격포리 죽막동 마을. 바다로 돌출한 곶의 끝에 있는 수성당 앞에서 발굴하였다. 이곳은 고대 연안항로의 중간 기항지였으며 무사 항해를 빌던 곳이었다.멀리 고군산군도가 보인다.

한편 이곳에서 나는 해송(海松)은 '변재(邊材)'라 하여 예로부터 궁재(宮材)와 선박재로 쓰였다. 고려 때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변산과 장흥 두 곳에 조선소를 두고 배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조선 숙종 때에는 '변산송금절목(邊山松禁節目)'을 두고 변산의 소나무를 특별 관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해송은 백제가 서해를 지중해 삼아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큰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를 할 수 있는 선박의 건조를 가능하게 하였다. 주산면의 배맷산은 이러한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변산이 해상활동의 거점임을 나타내주는 유적이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서 발굴된 제사유적이다. 1989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산36-17 일대를 발굴해온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조사단은 이곳이 삼국시대 당시 백제의 고대 왕권이나 토착세력에 의해 해상교통과 관련된 제사가 빈번히 이루어졌던 노천제사유적임을 출토물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호남 평야 내륙으로 쑥 들어온 곰소만은 서해안의 여느 개펄과는 달리 갯골이 발달돼 있어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닐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줄포 항구가 일제 때 쌀을 수탈해가던 항구로 기능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