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왕과 복신의 내분

 

내분은 항상 쇠퇴 국면에 찾아온다. 천도에 실패한 백제의 지도부에 내분이 발생하였다. 풍왕과 복신간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풍왕은 왕으로 옹립되기는 하였지만 재지적(在地的) 기반이 없었고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명목상의 통수권자로서 정신적 구심점 역할밖에 수행할 수가 없었다. 또한 풍왕은 의자왕의 적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풍왕으로서는 아저씨뻘 되는 복신이 항상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부흥군의 한 축인 도침을 제거하고, 대중적 인기와 신망을 한몸에 지닌 백제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였던 것이다.
마침내 풍왕은 복신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이 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로지하더니 부여풍과도 점차 시기가 생겼다. 복신은 칭병하고 굴실에 누워 풍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근하고 신임하는 자들을 이끌고 복신을 엄살하였다."

울금바위 뒷편에 또 하나의 작은굴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천지2년(서기663년) 6월에 백제왕 풍장이 복신의 모반할 마음을 의심하여 가죽끈으로 손바닥을 꿰어 결박하
고......달솔 묵집이 이런 악독한 반역자는 살려두어서는 안된다 하여......목베어 소금에 절였다. 3월 갑오 에 신라는 바로 침입하여 유쥬를 취하기를 도모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때 복신이 이미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풍을 제거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병을 핑계로 구차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보면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내분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는 회복하기 힘든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복신굴_<구당서><삼국사기>등에 나오는 복신의 굴실. 이 굴실은 2~300명이 들어갈 정도로 넓으며 호남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백제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암사 뒤 울금바위에 있다.
▲제2 복신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