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명산(半島名山) 옥녀봉(玉女峰)

  우리나라 전역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들이 참 많다. 변산에도 세 곳에나 옥녀봉이 있다. 남옥녀봉(바디재), 북옥녀봉(어수대 북쪽, 하서와 상서의 경계), 서옥녀봉(변산면, 운호리와 마포리의 경계)이다. 삼국유사에 “진표율사는 선계암에서 옥녀봉을 지나 마천대 부사의방장에 도착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의 옥녀봉은 바디재에서 오르는 남옥녀봉을 지칭한 것이리라. 남옥녀봉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봉 바로 아래에 줄포. 보안. 변산팔경 중의 1경인 ‘웅연조대’, 고창 방장산과 마주하니 산 아래가 모두 들(野)이며 해안으로서 전망이 일망무재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은 모두 시원하며 무엇 하나 눈을 거슬리는 장애물이 없어 더욱 좋은 곳으로 발아래 …

낙조대(落潮臺)-만경창파 불태우며 진홍으로 물들일 때…

    변산면 지서리 운산마을를 지나 남여치로부터 시작되는 잡목 숲길을 따라 가파른 산등성을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발아래 펼쳐지는 칠산바다의 고기잡이배를 눈 시리게 바라보며 참으로 아름다운 고장에 살고 있는 자부심을 갖는다. 길섶에 위치한 약수터에서 한 바가지 물로 목을 축인 후 남은 거리를 아끼며 도착한 곳이 유서 깊은 월명암이다. 일행은 월명암에 소원 성취를 합장한 후 바로 뒤편 노송 길을 따라 20여분 다시 오르니 일망무제(一望無際) 서해 바다가 한눈에 와락 다다른 곳 이른바 변산 제일경인 낙조대…. 누대에서 바라보는 서해 바다 끝 어느 곳에 태양이 밤을 …

월명암(月明庵)에 올라…

  월명암 제1경이 월명무애(月明霧靉)이며 득월대의 달돋움을 못 보면 한이라는 월명암은 변산면 중계리에 위치한 변산의 중앙지이다. 운산리를 지나 쌍선봉을 향하여 잡목 숲길을 헤치며 가파른 산등성이 를 오르고 또 오르면 발아랜 칠산바다가 넘실거리며 일망무제 짙은 안개에 휩싸인 기봉에 다소곳이 자리한 곳이 유명한 월명암이다. 월명암은 서기 692년(신라 신문왕12)에 부설거사가 창건한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이 넘는 역사와 유서가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었다가 선조 25년 진묵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한말에는 이곳을 근거지로 의병이 왜경과 싸우다가 1908년 다시 전소되고 …

선계안(仙溪岸)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진표율사와 선계안’ 보안면 우동리 뒤 굴바위 앞 현재 우동리 저수지의 안쪽을 선계안 또는 성계골이라 한다. 일찍이 「삼국유사 권지4권에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편을 보면 진표는 금산사 숭제법사에게 “얼마나 수행을 해야 계율을 얻을수 있나이까” 하고 물으니 숭제법사는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이 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명심하고 변산 선계안에 들어가 3×7일을 수행하였으나 깨달음이 없자 다시 옥녀봉을 지나 변산 부사의방에 도착하여 행장을 풀고 3업을 닦는데 자신의 육신을 학대하는 망신참법으로 마침내 점찰계율과 신표간자 189쪽패를 얻었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한다. 두 번째 …

신선대(神仙台) 옛터

  청학동으로 간 신선대 사람들 6.25전쟁 후, 변산의 신선대에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어 18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좆아 사서삼경을 읽고, 상투, 댕기머리에 흰옷을 고집하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으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그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바로 그 곳이다. 1996년 경까지만 해도 추석 때 신선대로 성묘 오는 그들(은재필 씨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묘를 …

울금바위와 주류성(周留城)

    ‘고대명장 백제의 꿈 지금까지 전해오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인 우금산성은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 위쪽에 자리한 우금암(울금바위)을 중심으로 한 석성을 말한다. 이 산성의 규모는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동측선이 563m, 서측선이 675m, 총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010m,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 전체의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성벽으로 주위의 총길이 3.960m에 이르는 포곡식 성곽이다. 개암사에 보관되어 있는 개암사지(開巖寺址)에 따르면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282)에 변한(卞韓)의 문왕(文王)이 진한과 마한(辰韓馬韓)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우(禹)장군과 진(陳)장군을 보내어 여기에 도성을 쌓고 좌우의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짓게 하여 동쪽은 묘암(妙巖) …

변산 작목사 이규보와 부사의방장

  이규보가 본 부사의방장과 변산찬가 앞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인 이규보(李奎報 1168~1231)는 고려(元宗時代) 최충헌과 최우의 무신 정치 시대에 문신으로 평장사를 지냈으며 변산에는 벌목사(伐木使)로 부임하여 근무하면서 인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절에 부령 현령 이군 및 다른 손님 6, 7인과 원효방과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을 다녀왔다. 그 후 위위시판사가 되었으나 1230년 팔관회 정란(政亂)에 휘말려 다시 부안 위도 상왕등도(蝟島上旺嶝島)에 유배되는 사연으로 변산과 다시 인연을 맺는다. 그 후 귀향에서 풀려나 (高宗1237년) 문하시랑 평장사로 관직을 물러나게 된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다. 다음은 …

변산(邊山)의 수난(受難)

    원(元)나라의 일본 정벌 시 배를 건조한 변산 우리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보면 유사(有史)이래 수많은 타 민족의 침략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다. 이곳 영산(靈山)인 변산도 역사의 수난 속에서 온갖 시련과 희생을 겪어 왔으니 고려 시대로부터 6 .25동란까지의 수난을『부안 군지 1988』에 기록된 대강만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차로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는데 고려 원종(元宗15년 1274)년 원(元)나라는 일본 정벌(政伐)을 이유로 고려에 대소(大小) 전함 9백 척의 건조를 요구해 오는데 배(船)의 종류는 쾌속선(快速船) 3백 척, 몰수선(沒水船) 3백 척, 천석주(千石舟) 3백 척의 건조를 요구하고 원(元)나라는 총 감독관에 홍다구(洪茶丘) …

아! 아름다운 변산(邊山)

    노령산맥이 서해를 향해 달리다 한가닥 던져놓은 산뭉치 간혹 타지역(他地域)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안(扶安)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변산(邊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변산(邊山)은 부안(扶安)의 대명사이며 부안을 대변하는 지명이다. 부안(扶安)의 역사(歷史)나, 문화(文化), 생활(生活)의 터전이 변산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未來)의 부안까지도 변산(邊山)은 밖변산인 해변과 더불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것이다. 이러한 변산반도는 태고(太古)에 한반도(韓半島) 남, 서쪽을 내려 뻗고 있는 노령산맥(蘆嶺山脈)이 어쩌다가 저 넓은 호남평야(胡南平野)를 훌쩍 뛰어 넘어 서해를 향해 한 뭉치 던져 놓은 기묘한 형국으로 남, 서, 북은 모두 바다로 …

小松의 辯

  제가 그랬습니다. 구지(嶇地)에서 태어나 넓고, 높게 보지도 못하고 사려마저 깊지 못하니 세상을 살아가는 요량이 있었으리오 그저 덤벙거리다… 나름의 몫도 헤아리지 못한 채 괜스레 두려워 망설이는 사이 하나를 가진 사람은 둘을 향해 뛰어가고……. 열을 가진 사람은 백을 향해 달려간 후……. 나는 왠지 밀리고 채이고 부대낀 채로……. 누가 볼세라 고개를 숙인 채 모퉁이로 돌아 ……. 홀로 해명 태명 변방을 서성이다……. 어느 날은 죽장(竹杖)을 친구하여 변산(邊山)의 산새랑, 다람쥐랑, 청솔모 아줌씨랑 만난 듯 숨어 버리는 그들과 하루는 내변(內邊)에서… 한날은 돛단배 멀어져 간 황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