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 당시의 국제 정세
수에 이어 중원을 재통일한 당은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는 척하며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키우고 있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던 영류왕 고건무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영류왕 고건무는 서수남진을 주장하였지만 연개소문은 신라나 백제 중 한 나라와 동맹을 맺어 남쪽을 지키고, 당을 치는 남수서진을 주장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는 '당에 대하여 이를 쳐 없애고 지나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삼는 것이 연개소문의 필생의 목적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재위 641~660)은 해동증자라고 불리었을 만큼 영명한 임금이었다. 그는 왕족인 부여성충을 불러 국가 보전의 계책을 물었다. 이에 성충은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불측한 마음을 품고 있어 곧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 한동안 외국에 대한 일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고, 다만 신라가 선대왕(무왕)께 뺏긴 가잠성(오늘의 괴산)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낼 것'이라 하였다. 왕이 다시 가잠성의 수비책을 묻자 성충은 가잠성은 계백이 지키고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고 신라가 군사를 움직이면 가잠성을 돕는 척 하다가 군사를 돌려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진언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만족을 표하고 성충을 상좌평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3월 과연 성충의 말대로 신라의 김유신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잠성으로 쳐들어왔다. 계백이 수개월 동안 잘 방어를 하며 시일을 끌자 의자왕은 계백을 돕는다 하며 친히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북으로 향하다가 성충의 아우인 윤충으로 하여금 군사를 돌려 대야성(오늘의 합천)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야성은 신라의 서쪽 군사 요지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지키고 있었다. 윤충은 항복한 품석 부부를 죽이고 신라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백제의 상좌평 부여성충은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 중 한 나라와 화친하여 당과의 전쟁을 대비할 것이므로 고구려와 화친하여 동맹을 맺을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그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한편 백제의 침략에 딸과 사위를 잃은 신라의 김춘추는 "슬프다! 사나이 대장부로서 어찌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단 말이냐?"하며 원한을 뼛속에 새기었다. 그는 왕께 나아가 백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은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며 김춘추를 옥에 가두고 말았다. 김춘추는 고구려 대신 선도해를 꾀어 그로부터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龜兎之說)'를 듣고 기지를 발휘하여 간신히 사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끊임없는 백제의 공격에 국가 존망의 위협을 느낀 신라는 이제 당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매해 정월이면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은 데 이어 당과의 교통로인 당항성(오늘의 남양) 마저 위협하자 643년 9월에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 나라를 침략하므로 여러 번 수십성이 공습을 당하였는데, 두 나라가 군사를 연합하여 기어코 우리 나라를 공취하려 하며, 이 9월에는 그들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는 반드시 사직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므로 삼가 사신을 파견하여 대국의 군사를 청원하오니, 구원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644년 정월 신라가 당에 조공을 바치자 당태종 이세민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국서를 주어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현장은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신라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는 나라로서 조공을 게을리하지 않는 터이니, 그대 나라는 백제와 함께 곧 군사를 거두고 싸움을 그만 두라. 그리고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명년에는 반드시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이에 연개소문은 현장에게 "고구려는 신라와 원한으로 틈이 생긴지 오래 되었다. 지난 날에 수나라가 우리 나라에 침입하였을 때에는 이 틈을 타서 고구려 땅 5백리를 침략하여 그 성읍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니, 이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싸움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645년 3월 당태종 이세민이 마침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섰다. 고구려가 당의 대병을 맞아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신라는 3만의 군사를 내어 당을 도우려 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7개의 성을 빼앗아 신라가 움직일 수 없도록 하여 고구려를 도왔다. 더 나아가 성충의 동생 윤충으로 하여금 당의 남쪽 지방인 월주를 공격토록 하여 이를 식민지로 삼았다.
당의 출병이 실패로 돌아간 후로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648년 김춘추는 마침내 청병을 위해 당에 들어갔다. 당태종을 만난 김춘추는 "우리 나라는 한쪽 바다 곁에 있으나 대국을 섬겨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며 번번히 국토를 침략하고, 황차 지난해에는 대군을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수십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조회할 길이 막혔으니,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의 피해를 없애주지 않으면 우리 나라 백성들은 모두 그들에게 사로잡히는 바 되어 앞으로 바다를 건너 조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라면서 당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또한 김춘추는 복장을 중국의 제도에 따라 고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이듬해 정월부터 신라는 당의 의관을 쓰도록 함) 아들 문주를 남아서 숙위(宿衛)토록 한 후 귀국하였다. 귀국 도중 바다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죽을 뻔하였으나 김춘추를 모시던 온군해와 옷을 바꿔입고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650년 신라는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후일 문무왕)을 당에 보내 진덕여왕이 지은 '치당태평송'을 바쳤으며, 651년 정월에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 파진찬 김인문을 당에 보내 조공하고 그대로 머물러 숙위케 하였다.
한편 백제는 653년 왜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다져 고구려, 백제 왜에 이르는 추축이 형성되고 신라는 당과의 동맹관계를 확고히 하여 두 세력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