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통일을 시대의 아픔에서 꺼내다

    정진석(鄭振奭)은 1920년생으로 아버지 정익모(鄭益模), 어머니 유달천(柳達川)의 5남매 중 막내로 부안군 백산면 덕신리 임방마을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대의 기억 그의 자성록 『옳고 그름을 떠나서』에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초등학교 때 식량이 없어 아침을 굶고 학교에 간 배고픔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강의록으로 보통문관 시험 준비를 독학으로 하다가 선린학교 전수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유학의 꿈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보선상업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2차대전이 한창이었고 주로 영어공부와 책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경 입명관 대학 전문부 법정학과에 입학하여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

김철수, 이름 없는 혁명가의 길

    부안 출신 가운데 김철수라는 이름이 있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좌우합작으로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고 1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를 만큼 치열한 독립투쟁을 펼쳤다.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음에도 1986년 죽을 때까지 공안당국의 1급 감시 대상이었다. 국가보훈처는 2005년 8월 3일 독립운동가 김철수와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 주인공 김산을 비롯한 좌파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을 8.15 60주년에 서훈을 추서한다고 밝혔다. 김철수의 딸인 돈지의 용화 할머니께 전화 했더니, 선생이 원했던 조국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 평가였다면 하는 아쉬움과 나라를 찾기 위해 몸을 내 놓은 독립운동가를 …

뛰어난 외교가요 문장가인 김구

  김구(金坵1211-1278)는 고려 때 사람으로 우리 고장을 빛낸 인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본관은 부안이고 우복야 김의의 아들이다.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라 하였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와 지금의 변산면 지지포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지포선생이라 불렀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1278년(충렬왕 4)에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는 그의 학문과 공적을 기리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무덤은 그가 살았던 뒷산인 지금의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공적을 기록한 신도비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부안 김씨 후손들은 그의 무덤 옆에 경지제라는 재실을 지어서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12살의 나이로 …

행안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행안산은 어디인가 행안면(幸安面)은 1914년 이전에는 없었던 지명이다. 일제의 병탄 이후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염소방과 서도방, 남상방과 남하방의 4개 면방을 중심으로 행안면이 편성되었다. 이 행안면이란 지명은 행안산(幸安山)에서 온 이름이다. 그렇다면 행안산은 어디일까? 중종 25년(1530년)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 편의 산천(山川)조에 ‘행안산은 현 남쪽 10 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932년에 간행된 『부풍승람』에는 행안산이 현(縣)에서 남쪽으로 7리였고, 일명 시어산(侍御山)으로 불린다고 했다. 김정호가 1860년대에 펴낸 『대동지지』에는 행안산과 관련된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왜구의 침범이 그것이다. 고려 우왕 2년(1376)에 왜구가 곰소에 배를 …

전봉준과 다른 길에 선, 부안 대접주 김낙철

  김낙철(金洛喆 1858-1917)은 부안김씨이고 자는 여중(汝仲), 동학 도호는 용암(龍菴)이다.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에서 출생했다. 쟁갈마을은 안쟁가리, 용성리, 새멀, 송학동 등 네 개 뜸이 있는데 김낙철은 새멀에서 산 것으로 보인다. 김낙철은 체격이 크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700석 정도를 거두는 부자로 글을 읽는 선비였다. 동학에 입교하다 김낙철은 1890년에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교하였다. 동학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조선 사회가 당면한 어려움의 실상을 알 수 있었고 동학을 통해 극복 할 수 있다고 확신한 듯 하다. 교도가 증가함에 따라 교주 최시형이 순회 포교에 나서 1892년 7월에 …

유형원, 부안에서 꿈을 준비하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살던 우동리 마을은 부안 김씨들의 집성촌이다. 김홍원이 유관이 국가에서 받은 땅을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으로 부터 매입한 이후 이곳은 부안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반계라는 호를 통해본 유형원 반계라는 호는 그가 살던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서 호를 따 왔다고 하나 부안 김씨 고문서에는 분명히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 이름은 장천(長川)이라고 하였다. 반계는 오늘날 중국 섬서성 보계시 동남에 있는 강물로 남산이란 곳에서 물줄기가 시작되어 북쪽으로 흘러 위수라는 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강태공이라 부르는 태공망 여상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기 전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

변산에 심은 오건의 작은 꿈 하나

  농촌이 해체되는 이즈음에 서울에서 내려와서 부안에서 농사지으며 농촌을 살려보고자 온몸을 던지고, 이곳에 뼈를 묻은 사람이 있다. 오건(吳建: 1948~1991)은 1948년 10월 2일에 소설가 오영수와 교사인 어머니 김정선 사이에서 2남 2녀 중 세 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80년대 민중 판화가로 활동하다가 요절한 오윤이다. 오건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자랐다. 1974년에 부안에 내려와 변산면 도청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91년 1월 21일 죽기까지 변산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지었다. 상록수를 꿈꾸다 오건이 살던 집 뒤편 양지바른 묘 앞의 소박한 상석은 따뜻한 글씨로 그를 기린다. 여기 …

해창다리, 흑백사진 한 장

변산사람들은 오늘도 흑백사진으로 남아 그 때의 감동을 전한다. 해창다리 건너 격포로 간다. 사람들은 해창다리라 부르나 관에서는 변산교(邊山橋)라 이름 한다. 이 다리는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뒤 몇 차례 변화를 겪은 밋밋한 콘크리트 다리이다. 이 다리를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을 봤다. 1980년에 변산문화협회에서 편찬한 『부안 향토문화지』에는 ‘변산교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흑백 사진이 한 장 나온다. 소화(昭和) 12년(1937) 8월 28일에 거행된 해창다리 개통식 광경이다. 다리 끝에는 신사복 입은 사람들이 서 있고 그 뒤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이 길과 주변 산 위를 빼곡히 덮고 …

지운 김철수 선생 19주기

김철수를 다시 생각한다 지운(遲耘)김철수(金錣洙 1893-1986)는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아버지 김영구와 어머니 신안 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지주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재산이 있었고 원천리의 수로를 이용하여 쌀 위탁 판매업도하는 넉넉한 가정이었다. 독립운동에 몸을 내어놓다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 군수를 지내다 군수직을 사직한 서택환이 서당을 열고 있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서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우고 민족의식에 눈 뜨게된다. 서택환은, “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일본유학시기에 사회주의에 접하고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택했다.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열지동맹」「신아동맹단」을 조직하고 귀국해서는 최팔용․최혁․장덕수 등과 …

쑥댓골 가는 길

  60년대엔 부안에도 버스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많았다. 쑥대골은 귀빠진 곳이어서 다니는 차가 없어서일까. 이곳에 갈 때마다 걸어다녔다. 옛 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성황산 밑의 한옥 마을 지나면 성황산 중턱의 띠처럼 이어진 산길에 들어선다. 산길은 짐승들이 다니던 길이었다는데 사람들이 노루랑 산토끼가 다니던 길을 빼앗은 셈이다. 성황산 끝물 신선마을 지나서 한가매와 고개를 넘으면 물 좋다는 옹달샘 만난다. 쑥댓골 가는 길 지비리 방죽은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산 위에서 봤을 때 방죽은 큰 그림처럼 보였는데, 어른들은 말같다고도 하고 용같다고도 했다. 방죽 옆 솔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