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군의 총공격과 백강전투

내분으로 인해 백제의 상층부가 흔들리자 신라와 당은 이를 백제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부리뽑을 기회로 보고 총공격을 서둘렀다. 유인궤가 본국에 구원병을 청하자 당고종은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군사 7,000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원을 돕도록 하였다. 그는 7월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던 부여융을 백제 왕으로 삼아 앞세워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하였다. 한편 신라왕은 김유신 등 3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웅진으로 와 당군과 합세하였다.
백제의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응하여 왜는 선박 1천여 척에 군사와 물자를 싣고와 백강 어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백제는 당의 반간계(反間計)에 쉽게 무너져 내렸다. 손인사는 백제의 진영에 몰래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꾀었다.

▲주류성에서 내려다 본 백강_지금은 들판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였다.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 나뭇개이며 이곳은 일제때까지만해도 포구였다. 멀리 보이는 나즈막한 산은 호치산으로 당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며 군마골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에 복신을 따르던 남부달솔 흑치상지, 진현성주 사타상여 등이 풍이 복신을 죽인 것을 원망하다가 융에게 투항하여 주류성의 풍왕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지수신은 "어찌 상좌평의 죽음을 아파하여 당에 항복한단 말인가. 그것은 당을 몰아내고자 한 상좌평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백제를 배반하는 일이다." 하며 주류성이 무너진 뒤에도 한달 동안 임존성에서 저항하다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당군은 총공격 목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가림성(加林城:부여군 임천면)을 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유인궤는 '병법에 실한 곳은 피하고 허한 곳을 치라 하였는데 가림성이 굳고 험하니 공격하자면 군사가 상하고 지키자면 날짜가 걸리게 되지만,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그 떼가 모였으니 만약 이긴다면 여러 성이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며 주류성을 먼저 치기를 주장했다. 결국 나당연합군의 공격 목표는 백제군의 중심 거점인 주류성으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나당연합군은 육로와 수로로 나누어 주류성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663년 8월의 일이었다. 풍왕은 백제군을 거느리고 백강의 강가에 주둔하며 선단을 지키면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당의 수군과 왜의 대선단이 대해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28일의 이 해상 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은 당의 수군을 맞아 네 번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의 상황이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백강 어귀를 지키던 백제와 왜의 주력군은 무너지고 풍왕은 나당군의 수륙 양면으로부터의 협공을 받고 대패하고 말았다. 풍왕은 보검 한자루를 떨어뜨리고 황망히 몸을 피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탈출하였다. 이 때 들른 섬이 위도 서쪽에 있는 왕등도라 한다. 당시의 처절했던 백강 전투는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백강 전투의 패배 원인은 지리적 조건과 기상을 고려치 않은 백제왕과 일본 장수들의 무모한 작전에 있었다. 즉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 했는데 이는 썰물로 인해 수심이 급격히 낮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후 당은 부흥군의 총본영인 주류성을 공격하였고 9월 7일 마침내 함락시켰다. 백강전투의 상황을 담은 설인귀에 답하는 문무왕의 글을 보자.

마침내 주류성은 함락되고 왕은 도피하였으나 지수신이 지키던 임존성은 아직도 굴복하지 않거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