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피성 천도

 

6당의 요구에 의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던 신라는 백제가 풍왕을 맞아들여 흩어진 세력을 규합해 나가자 위기를 느끼고 다시 백제 공격에 나서며 사비성에 고립된 유인궤와 다시 연합하였다. 신라는 식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한 당을 돕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복신이 이끄는 백제는 다시 한번 패배를 맛보았다.

위 기록에서 보듯이 신라는 다시 당과 연대하여 백제의 마지막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 이에 백제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피성 천도였다. 피난 정부가 있던 주류성은 배후에 험지가 있고 앞으로는 조수가 드나드는 개펄이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이는 방어에는 유리하였으나 많은 주민을 취합하고 모든 저항 세력을 통합하여 전체 부흥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중심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복신과 풍왕은 피난 정부를 옮기기로 합의하였다. 이 때의 기록을 <일본서기>를 통해 알아보자

▲벽골제(사적 제 111호)._김제시 부량면에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3년 (백제 비류와 27년)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하였으며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수리하며 사용하였다. 수몬지임을 알려주는 이와 같은 거대한 돌기둥은 3군데에 1쌍씩 있다.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가로 원형이 크게 파손되었다. 제방은 포교리에서 월승리까지 남북직선으로 약 3km쯤 남아있다.

여기서 피성은 오늘의 김제이며 동남쪽의 깊은 진흙의 큰 제방은 벽골제를 말한다. 이 피성 천도에는 풍왕과 복신의 의견이 일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663년 들어 신라는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방면을 통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였다. 신라는 김흠순과 천존 등의 장수를 보내 거물성(居勿城:전북 남원과 장수 사이?)과 사평성(沙平城:전남 승주)을 쳐서 항복받고, 또 덕안성(德安城:충남 은진)을 쳐서 1,070명의 백제군 전사자를 내게 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663년 2월의 일이었다. 이렇듯 신라가 다시금 총공세로 나오자 복신과 풍왕은 3월에 다시 주류성으로 피난정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 2개월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