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읍성 성문거리 당산의 형태와 기능

  부안읍성의 성문거리에 조성된 당산의 신체는 오리솟대의 석간신주(石竿神柱)와 한 쌍씩의 장승으로 조성 배치되어 있다. 오리솟대당산 신간이 마을지킴이의 주신(主神)이요, 돌장승들은 주신을 돕는 보조기능의 하위(下位) 당산신장으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수문장격(守門將格)이어서 흔히 문지기장군이라고도 말한다. 당산신의 호칭은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호칭이다.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다. 당산신을 할아버지, 할머니로 호칭하는 것은 친숙한 가족 같은 개념으로 의인화(擬人化) 한 것이며, 마을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가장 어른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과 여 양성으로 호칭하는 것도 당산신이 부부로 이루어져야 다산(多産)과 풍요, 그리고 번창을 이룰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

부안읍성의 성문거리 솟대당산들

  마을 지킴이 신을 섬기는 민간신앙(1) 지금의 부안읍내는 조선조 태종(太宗)말 이후로 부안군의 행정 중심지인 치소(治所)였으며, 이 치소의 방호(防護) 성곽인 부안읍성이 평산성(平山城)의 원형 형태로 축조되어 1900년대 초까지 그 원형이 어느정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참담하리만큼 깡그리 훼철되어버려서 그 자취마저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앞의 <부안읍성(扶安邑城)과 그 문화> 제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이 부안읍성의 동서와 그리고 남의 세 곳 성문거리에는 돌을 깎아 세운 석조신간(石造神竿)의 솟대당산과 한 쌍씩의 돌장승이 조성되어 성안 사람들의 지킴이 신으로 바뜰어저 오고 있다. 이들 성문거리의 지킴이 신들은 성안 사람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 원화소복(遠禍召福) …

여몽동정군의 전함을 건조한 검모포진

  이제 여몽(麗蒙)의 동정연합군(東征聯合軍)이 제1차 일본 침공을 하였을 때 약 3만 여명의 연합군을 수송한 전함 9백여 척을 변산(邊山)과 천관산(天冠山)에서 건조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몽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사》의 충렬왕(忠烈王) 즉위년 10월초와 김방경전(金方慶傳)에는 몽고군이 2만5천명에 고려군이 8천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인 학자 이케우찌(池內宏)의 심도 있는 연구서(元寇의 新硏究)에 의하면 몽고군 2만 명에 고려군이 5천 3백 명으로 나타나 있다. 《고려사(高麗史)》 제27권 원종(元宗․15년․1274년) 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갑술(甲戌) 15년 봄, 정월에 원나라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보내어 전함 3백척의 조선을 …

변산에서 여몽 동정연합군 전함을 만들다-수군의 요충지 검모포진(黔毛浦鎭)

  보안현(保安縣)의 검모포진영 지난 1999년 3월 20일 밤 8시 10분에 방영한 KBS1 텔레비전은 그 중후한 역사 스페셜 프로에서 『해상왕국 고려의 전함』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 방면의 전문적인 연구자, 역사학자와 고증의 자료들을 동원하여 다양하고도 구체적이며 과학적인 고증으로 재현 하면서 우리나라가 통일신라 말기 장보고(張保皐) 이후 고려시대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상권을 지배한 해상의 왕국이었음을 입증하여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1274년(충선왕:1년) 10월초에 몽고(蒙古;후에 元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몽 동정연합군(麗蒙東征聯合軍)을 편성하고 3만여 명이 900여 척의 수송 전함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하카타에 상륙하여 크게 무찔렀으나 일본인들이 이른바 가미카제(神風)라 하는 태풍을 …

계화도(界火島) 봉수대

    계화도(界火島)는 1977년에 완공된 계화도간척공사로 바다 속의 외딴 섬이 육지로 되어 지금은 섬이 아니며, 1983년 이전까지는 부안군 행안면(幸安面)에 속해있었던 섬이었다. 바다를 막아 육지가 된 이후 행안면에서 분리되어 계화출장소로 잠시 있다가 1983년 면으로 승격되면서 계화도와 간척지 너른 땅이 중심이 되어 계화면(界火面)이라는 새로운 면이 탄생되었으며 그 행정치소는 창북리(昌北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계화도봉수대는 남으로는 점방산(占方山)봉수대에 응하고 북으로는 만경현(萬頃縣)의 길곶이(吉串)봉수대에 응한다 하였다. <占方山北准界件伊 界件伊北准萬頃吉串> 세종당시 계화도 계화리를 계건이(界件伊)라 하였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界火島烽燧 北應萬頃縣吉串 南應占方山> 계화도봉수대는 해발 246m의 계화산의 정상에 …

대항리 점방산(占方山) 봉수대

  변산면 대항리(大項里: 한목) 점방산(占方山)봉수대는 남으로 격포 월고리산(月古里山)봉수대와 상응(相應)하고 북으로는 계화도(界火島)봉수대와 서로 응하는 연안의 봉수대다. 《세종실록》지리지 봉수조에 <占方山北應界件伊>라 하였는데 계건이(界件伊)란 계화도(界火島)를 가리킨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안현 봉수조에도 <점방산봉수(占方山烽燧): 현의 서쪽 61리에 있는데 남으로 월고리(月古里)에 응하고 북으로 계화도(界火島)에 응한다>하였으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산내면 대항리 봉화산 원형 경오간(山內面 大項里 烽火山 圓型 徑五間)>이라 하였다. 그리고 1989년에 발행한 《전라북도지(全羅北道誌)》의 봉수조에는 <…이곳은 변산해수욕장이 있는 동편으로 승람에서 말한 61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수욕장과 해창(海倉)의 중간에 있는 해발 260m 고지 상에 있어 북으로 계화도에 연결 된다>라고 하였다. 또 1992년 전북체신청에서 …

격포 월고리산(月古里山) 봉수대

이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부안땅에 있었던 세 곳의 봉수대(烽燧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 부안에는 변산반도의 서해안을 따라서 세 곳에 봉수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근래에 그 유적지를 찾아내어 복원도 하고 그 주변을 정리도 하여 놓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전라도 부안(扶安) 조에 의하면 <봉화대가 세 곳이 있다. 현의 서쪽 월고리(月古里)에 있는데 남으로 무장(茂長)의 소응포(所應浦)에 따르고 북으로 점방산(占方山)이 따른다. 점방산에 있다. 북으로 계건이(界件伊)가 따른다. 계건이에 있다. 북으로 만경(萬頃)의 길곶이(吉串)가 이에 좇는다.(烽火三處 縣西月古伊 南准茂長所應浦 北准占方山 占方山北准界件伊 界件伊北准萬頃吉串)>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똑같이 보인다. 다만《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현과의 …

부안의 봉수대(烽燧臺)

    봉수대의 기원과 기능 봉수(烽燧)라 함은 횃불(烽)과 연기(燧)로써 급한 소식을 전했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를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방식인데. 우역(郵驛)의 역참제도(驛站制度)와 더불어 전근대적인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방의 군사적인 국방 전보기능(傳報機能)의 하나였다. 이와 같은 봉수의 조직망은 전국을 다섯 횃불선(五炬)으로 하여 제도적으로 조직화 하였는데 조선조 말엽 근대적인 통신시설인 전신전화(電信電話)가 설치되면서 1894년 전국의 봉수대 불이 꺼지고 폐지되어 지금은 그 자취만이 옛 무화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 부안에는 제5거선(第五炬線)의 연안봉수(沿岸烽燧)가 변산면 격포(格浦)의 월고리(月古里) 봉수대, 대항리(大項里)의 정방산(占方山) 봉수대, 그리고 계화면 …

세곡을 갈무리 했던 사창(社倉)

   <고려사(高麗史)>제79권 조운(漕運) 조에 의하면 고려 국초에 보안현(保安縣)에 안흥창(安興倉)을 두었다고 하였다. 안흥창은 각 지방의 세곡을 거두어 국가에서 저장 관리하는 조운창(漕運倉)의 하나였다. 보안현에 있었다는 안흥창은 제안포(濟安浦)에 있다고 하였으며, 제안포는 전에는 무포(無浦)라 하였고<濟安浦: 前號無浦 保安郡安興倉在焉> 보안군에 안흥창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의 보안면 남포리(南浦里) 근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남포리 근처에는 지금도 옛날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창(社倉)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이 사창은 조선조 시대에 부안지방의 다섯 곳에 있었던 사창 중의 하나였다. 《고려사》에는 또 부안지방의 포(浦)에 관한 지명 세 곳도 보이는데 검모포(黔毛浦)와 여섭포(勵涉浦), 제안포(濟安浦)가 그것이다. 검모포에는 수군(水軍)의 …

부안의 나루(津)

    나루는 강이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터 즉 장소를 말한다. 배로써 사람, 또는 물자를 실어 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기에 도(渡), 진(津)이라 하였으며, 이보다 좀더 큰 규모면 포(浦), 더 큰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 하였다. 역사적인 먼 옛날의 나루로는 백제(百濟)의 두 번째 도읍지 이름이 곰나루(熊津)로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公州)지방의 금강(錦江)나루였음을 알 수 있고, 우리 부안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나루로는 동진강 하구, 지금의 동진대교(東津大橋) 자리에 있었던 동진(東津)나루였다. 동진나루는 1970년대 말경까지도 있었으며, 숫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