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봉수대(烽燧臺)

 

▲격포 월고리봉수대해창ⓒ부안21

 

봉수대의 기원과 기능

봉수(烽燧)라 함은 횃불(烽)과 연기(燧)로써 급한 소식을 전했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를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방식인데. 우역(郵驛)의 역참제도(驛站制度)와 더불어 전근대적인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방의 군사적인 국방 전보기능(傳報機能)의 하나였다.

이와 같은 봉수의 조직망은 전국을 다섯 횃불선(五炬)으로 하여 제도적으로 조직화 하였는데 조선조 말엽 근대적인 통신시설인 전신전화(電信電話)가 설치되면서 1894년 전국의 봉수대 불이 꺼지고 폐지되어 지금은 그 자취만이 옛 무화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 부안에는 제5거선(第五炬線)의 연안봉수(沿岸烽燧)가 변산면 격포(格浦)의 월고리(月古里) 봉수대, 대항리(大項里)의 정방산(占方山) 봉수대, 그리고 계화면 계화도(界火島) 에 계화(계건리(界件伊)) 봉수대의 자취가 남아 있어 1990년 말경 복원되었다.

봉수의 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 옛날부터 있어 왔으며, 중국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주(周)나라에서 이미 봉수로써 북방의 견융족(犬戎族) 침공에 대처하였음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나라 13대 왕인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요녀(妖女)에게 빠져 봉수로 작란질 놀이를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피살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봉수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駕洛國記) 조에 보이는데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허왕후(許王后)를 맞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건무(建武) 24년(AD 48) 7월 27일 구간(九干) 등이 조알(朝謁)할 때 말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들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었으니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 경기 안에 있는 나라)에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留天干)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뛰어내려 오므로 신귀간이 이것을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듣고 무척 기뻐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이 기록은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留天干)등이 멀리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뛰어내려오므로… (…忽見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까지에 의미가 있다. 즉 허왕후가 타고 오고 있는 먼 곳의 배를 향하여 횃불을 올려 신호하니 서로 뜻이 전해졌음이다. 봉수(烽燧)로써 교신이 된 원초적 방법인 것이다.
위의 부분에 대하여 1992년 전북체신청에서 발행한 《全北의 烽燧臺》에서는 留天干, 승점(乘岾)을 「유천간(有天干), 승참」으로 잘못 기록하였는데 이는 원전(原典)에 충실치 못하였거나 교정의 잘못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부안시민문화모임에서 발행한 <부안마당>지에 어느 분이 쓴 「부안의 봉수대」에서도 똑같이 「有天干, 승참」이라 잘못 쓰고 있다. 아마도 《全北의 烽燧臺》글을 그대로 베껴 쓴 것 같으나 인용여부에 대하여 한마디의 언급도 없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남이 쓴 글을 인용할 때에는 <누가 쓴 무슨 글에 의하면…>하고 그 출전을 분명하게 밝혀야 함은 기본적인 상식이요 예의며, 표절(글도둑)의 시비에도 말려들지 않고 독자에게도 혼란을 주지 않는 것임을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어떠하였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제23권, 백제본기(百濟本紀) 제1, 시조 온조왕(溫祚王) 10년 9월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므로 왕이 군사 2백 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싸우다가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지키더니 왕이 몸소 정예한 기병 1백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와 구원하니 저들이 이것을 보고 즉시 물러갔다.(…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遺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卽退)>

위의 기록 「…왕이 몸소 정예한 기병 1백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와 구원하니…」에서 봉현(烽峴)이 봉화(烽火)를 올렸던 높은 고갯마루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이외에도 봉산(烽山), 또는 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어떤 형태로던지 군사적인 전신(傳信)의 기능을 하였던 봉수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조선시대 봉수망/자료출처《全北의 烽燧台》<1992년 전북체신청 간>

 

봉수제도의 확립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전부터 북방 흉노족들의 잦은 침공에 대비하여 봉수(烽燧)의 제도가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봉수의 제도가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나 그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록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확실한 시발은 고려(高麗) 중기로 보아진다. 고려시대 봉수(烽燧)에 관한 기록은 인종(仁宗) 1년인 1123년에 송(宋)나라 사신의 한사람으로 고려의 송경(松京:개성)을 다녀간 서긍(徐兢: 1091~1152)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봉수제도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노윤적(路允迪)을 정사로 한 송(宋)의 사절단은 1123년 5월 16일 지금의 중국 절강성 명주(明州)를 신주(神舟:관선) 2척과 객주(客舟:민간인 선박) 6척, 8척의 선단으로 출발하여 6월 3일에 목포의 서쪽바다 흑산도(黑山島)에 도착하여 묵었고, 6월 6일에는 군산도(群山島: 지금의 고군산도)를 거쳐 12일에 예성항(禮成港)에 입항하여 순천관(順天館)에 입주하였으며 이후 약 1개월간 고려에 머무르는 동안 사절단원 중의 한사람인 서긍(徐兢)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 25항목에 걸친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 사행보고서(使行報告書)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며, 흔히 줄여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고 한다.

서긍(徐兢)이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해설하여 쓴 이 《고려도경》에는 당시 고려의 여러 문물제도와 갖가지 민속문화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연안(沿岸)의 봉수전신(烽燧傳信)까지도 적고 있다. 송나라 사신 일행이 6월 3일경 흑산도(黑山島)에 이르러 하루 밤을 묵었는데 사신의 도착을 중앙정부에 알리는 봉화가 삽시간에 서울(송도)까지 전달되는 과정을 《고려도경》 35권 해도(海道) 2, 흑산도(黑山島)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라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흑산도) 유배되어 온다.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고려의 서울인 송도)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中國大罪得貸死者 多流竄於此每 中朝人使舟至 遇夜於山顚 明火於烽燧諸山次第相應 以迄王城 自此山始也…)>

서긍(徐兢)이 흑산도에서 목격한 사신일행의 도착을 알리는 봉화는 필시 우리 부안지방의 봉수대를 거쳐서 전해젔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산도에서 올렸던 봉화는 아마도 제5거(第五炬: 당시는 4거(炬)까지만 있었지만) 직봉선(直烽線)인 목포(木浦) 유달산 봉수대와 무안(務安)의 고림산(高林山) 봉수대에 이어지고 함평(咸平)의 옹산(瓮山) 봉수대와 해제(海際) 봉수대를 거쳐 영광(灵光)의 고도도(高道島) 봉수와 차음산(次音山)과 홍농산(弘農山) 봉수, 고창(高敞) 무장(茂長)의 고리포(古里浦)와 소응포(所應浦)에서 받아 부안(扶安)의 격포(格浦) 월고리(月古里) 봉수대에 이어져서 대항리(大項里) 점방산(占方山) 봉수대로 이어지고, 이것을 계화도(界火島)의 봉수대에서 받아서 만경(萬頃)의 길곶이(吉串), 옥구(沃溝)의 사자암(獅子岩) 봉수와 화산(花山) 봉수, 임피(臨陂)의 오성산(五聖山), 불지산(佛智山), 남포, 보령의 옥미봉(玉眉峰)과 조침산(助侵山)으로 하여 서해의 연안을 타고 거슬러 개경(開京: 고려의 서울)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80여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위의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의 봉수에 관한 기록은 외국의 사신으로서 잠시 스쳐 지나가면서 그 겉 양상만을 보고 기록한 것이어서 제도나 제반 규정 등에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고려도경》보다 약 25년쯤 후인 1149년 의종(毅宗) 3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曺晋若)이 임금에게 아뢰어 봉수제도(烽燧制度)에 관한 규정을 보다 더 세밀하게 정하였는데 이는 매우 자세하고 확실하다. 《고려사(高麗史)》 권81, 병제(兵制) 오군(五軍) 조에 이에 관한 기록이 밝혀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曺晋若)이 아뢰어 봉획식(烽꟰式: 봉수에 관한 방식)을 정하였는데 평시에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각기 하나로 하고 이급(二急: 평시보다 조금 위급한 상황)이면, 둘, 삼급(三急)이면 셋, 사급(四急)이면 넷으로 하며 매소(每所)에 방정(防丁) 2인, 백정(白丁: 봉수군) 20인으로 하되 평전(平田:밭) 1결(結)을 예급(例給)하였다(西北面兵馬使 曺晋若奏 定烽꟰式 平時 夜火晝烟各一, 二急二, 三急三, 四急四, 每所防丁二 白丁二十人 各例給平田一結)>고 하였다.

조진약(曺晋若)의 건의에 의하여 정해진 위의 제반 규정은 그 후 약간씩 보완 수정되면서 조선조로 이어졌지만 몽고의 침입과 그 지배하에서 오랫동안 봉수제도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가 몽고가 물러가고 서해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면서 차츰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봉수제도의 발달

고려(高麗) 제18대 의종(毅宗) 3년인 1149년에 이르러서야 봉수의 제반 격식이 규정되었는데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구분하여 신호하기로 하고 적군과 접근하고 있는 변경(邊境),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과 서남 해안지방에서의 급변하는 적정의 완급에 따라서 거화(炬火: 횃불)의 수를 다르게 정하였다.

즉, 변방의 요새지역이나 바다와 연안이 아무런 일도 없이 평화로우면 횃불이나 연기 일거(一炬), 즉 하나를 올리고 위급한 상황이나 사태의 추이가 장차 험악하게 전개되려하면 두 개를 올리며 적군이 침입하여 곧 전투가 벌어질 상태이면 세 개, 적과 아군이 접전하여 전황이 급박하여지면 사거(四炬)를 거화(擧火)하도록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봉수대마다에 이를 관리하는 책임자 방정(防丁)과 봉수군(烽燧軍: 白丁)의 정원수를 정하고 이들의 급식과 운영을 위한 경제적 뒷받침으로 1결(結: 1결은 벼 약 1만 묶음이 수확될 수 있는 농지의 면적)의 평전(平田)을 배정하여 주었다.

고려의 중앙정권 확립이 성종(成宗)과 현종(顯宗) 연간인 10세기 말경에서 11세기 초에 강화 확립되어 지방통제 강화 기능의 일환으로 우역(郵驛)의 제도도 이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서 봉수의 제도도 같은 시기에 확립되었을 것으로 보아지며 앞의 조진약(曺晋若)이 자세한 격식을 규정한 것은 이를 더 보완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고려의 봉수제도는 1230년대 이후 몽고의 침입과 저들의 지배하에서 크게 무너지고 원(元)나라 봉수제도에 따른 듯 하며 원의 세력이 점차 쇠퇴하면서는 서해를 중심으로 왜구(倭寇)들의 노략질이 잦아져 봉수제도가 다시 정비되었을 것이다. 1351년 충정왕(忠靖王) 3년 8월에는 송악산에 봉수소(烽燧所)를 두었고 장교 2인, 군인 33인을 간수군(看守軍)으로 배정하기도 하였다. 1377년 우왕(禑王) 3년 5월에는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위급함을 알리는 봉화가 하루 종일 올라오므로 경성(京城)의 경계를 엄히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 무렵 부안지역인 보안현(保安縣)의 검모포(黔毛浦: 곰소)에 왜구(倭寇)들이 대거 침공하여 보안현은 물론이요, 적현(狄峴: 호벌치)를 넘어와 부령(扶寧)까지 도적들이 점령한 기록도 보이는데 이에 대한 봉화도 서해 연안의 봉수 노선을 따라 개경(開京)으로 알려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나세(羅世)와 변안렬(邊安烈) 두 장군이 토벌군을 이끌고 동진강(東津江)을 건너 행안산(幸安山)에서 왜구들을 섬멸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봉수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서 더욱 강화하였으며, 태종(太宗)에 이어 1419년 세종(世宗) 1년에는 종전의 봉수 사거(四炬)제도를 오거(五炬)의 방식으로 거화법(擧火法)을 더 세분하고 봉수군들의 근무소홀에 대한 과죄규정(科罪規定: 처벌규정)도 정하였으며, 세종 4년에는 각 봉수처에 연대(烟台)를 높이 쌓고 그 위에 병기등을 배치하여 주야로 간망(看望)을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봉화대에서 적의 동향과 내침을 보아가며 횃불을 올리거나 연기를 피워 알리는 봉수군에 대한 호칭은 고려말과 조선조 초기에는 봉졸(烽卒), 봉군(烽軍), 봉화군(烽火軍)이라 하였으나 봉화간(烽火干), 봉수군(烽燧軍), 간망군(看望軍), 후망인(堠望人), 해망인(海望人)이라고도 하였다. 해망인이라 함은 바다의 연안 봉수대에 근무하는 봉수군이란 뜻일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봉수군(烽燧軍)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봉수군의 신분은 한마디로 신양역천(身良役賤)이었다.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이지만 일의 담당에 있어서는 천인(賤人)이 하는 일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양반도 죄를 지으면 곤장을 때려 때에 따라서는 봉수군으로 내친 예가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보인다.

봉수군의 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면서 엄청난 고역인데 비하여 그에 대한 예우나 보상은 형편이 없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각 봉수대의 정원은 오장(伍長: 봉수 관리 책임자) 2명과 봉수군 5명씩 상하양번(上下兩番) 10명이며, 10일씩 근무하고 교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높은 산봉우리 비바람과 추위와 짐승들뿐인 곳에서 24시간 바다나 변경의 적정을 살피며 건너편 봉수대만 쳐다보는 파구꾼의 고역은 참기 힘든 천역일시 분명하였으며, 하번이 되어 봉수대에서 내려와도 봉수전(烽燧田)의 밭갈이 농사일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또 적정(敵情)은 시시로 긴박한데 비바람과 눈보라 등으로 횃불이나 연기가 흩날려버려 마주보는 봉수대에서 보이지 않게 되면 치고(馳告)라 하여 다음 봉수대까지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 전달하여야 하였으며, 이 같은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가는 중벌을 받게 되므로 봉수군이 도망하는 사례도 흔하였다 한다. 이에 대하여 봉수군의 군무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봉호보책(烽戶保策)으로 수포(收布: 군포를 거두는 일)하여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 200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