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나루(津)

 

▲동진다리에서 본 동진강 해오름. 배들이 메어있는 곳 쯤이 동진나루터로 여겨진다.ⓒ부안21

 

나루는 강이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터 즉 장소를 말한다. 배로써 사람, 또는 물자를 실어 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기에 도(渡), 진(津)이라 하였으며, 이보다 좀더 큰 규모면 포(浦), 더 큰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 하였다.

역사적인 먼 옛날의 나루로는 백제(百濟)의 두 번째 도읍지 이름이 곰나루(熊津)로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公州)지방의 금강(錦江)나루였음을 알 수 있고, 우리 부안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나루로는 동진강 하구, 지금의 동진대교(東津大橋) 자리에 있었던 동진(東津)나루였다. 동진나루는 1970년대 말경까지도 있었으며, 숫한 애환이 서렸던 부안의 1급 교통로요 관문이었다.

부안은 3면이 바다이고 호남평야를 남과 북으로 가로지른 동진강과 고부천(古阜川)이 흐르고 있어 나루(津), 개(浦), 항(港),금이(金 : 九味) 등이 많다. 동진강에 동진나루, 삼개나루, 군개(軍浦)나루가 있고, 고부천에 평교나루, 상포나루, 가다리나루, 모래뜸나루가 있었으며, 나무개(古棧)나루, 큰다리(大橋)나루, 해창(海倉)나루 등이 있었다. 이들 나루는 다리를 놓아 건너다니기도 하고 홍수 등으로 다리가 무너지면 나룻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들 나루들 중에는 사람의 내왕과 물자의 유통이 많은 나루에서는 건너는 선개(船價)라 하여 삯을 받았는데 동진나루. 백산의 군개나루. 가다리나루 등이 이에 속했다.

 

▲군개(軍浦)나루 터에는 군포다리가 놓여졌다.ⓒ부안21

 

부안지방의 나루 중 제일 큰 나루였던 동진나루에서도 다리(橋)와 나룻배가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안현 교량(橋樑)조에 의하면 <동진교 재동진상(東津橋: 吊津上)>이라 하였고, 같은 책의 산천(山川)조에는 <동진: 일명 통진이라고도 한다. 벽골(碧骨)과 눌제(訥堤)의 물이 합치어 북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 리에 있다(一名通津 碧骨訥堤之水 合而北流爲此津 在縣東十六里)>고 하였다. 16리란 약 6km 쯤이며 부안의 동쪽에 있는 나루라는 뜻의 동진(東津)이다.

그리고 다섯 곳의 포(浦)에 대하여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덕달포(德達浦)는 현의 북쪽 20 리에 있다 하고 사포(沙浦)와 굴포(堀浦)는 현의 서쪽 25 리에 있다 하였으며,, 장신포(長信浦)는 현의 서쪽 20 리에, 유포(柳浦 : 버드내)는 현의 남쪽 50 리에 있다 하였다. 이들 다섯 포(浦) 중에 장신포와 유포만 그 자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알 수 있으나 , 나머지 세 곳은 지금의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들 나루가 주로 사람들의 통행을 위하여 강물을 건너게 하여주는 기능을 하였다면 많은 양의 무거운 물산(物産)의 수송은 포(浦)나 항(港)에서 큰 수송선박에 의하여 수송하였다. 해산물의 집결지 또한 포나 항이었음은 예나 이제나 같다.

부안지방에는 나루가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의 지명이 35개가 넘는다. 그만큼 항포구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백산면의 군개(軍浦), 회포(回浦), 상포(上浦), 동진면에는 새포(鳥浦)와 문포(文浦), 장신포(長信浦), 남포(南浦)가 있으며, 하서면의 월포(月浦), 장신포(長信浦), 두포(斗浦), 대포(大浦: 堰浦), 변산면의 막음개(防浦), 송포(松浦), 지지포(知止浦), 고사포(古沙浦), 마포(馬浦), 격포(格浦), 통포(通浦), 언포(堰浦), 해안을 감고 돌면서 진서면에 이르면 왕포(旺浦), 망포(望浦), 석포(石浦), 여룬개(雲湖浦), 백포(栢浦)가 있고 보안면의 남포(南浦), 버드내(柳川浦), 외포(外浦: 이 일대를 고려시대에는 여섭포(勵涉浦)라 하였다.), 줄포면의 줄포(茁浦: 周乙浦 또는 主乙浦), 소왓개(牛浦)가 있으며, 이외에도 해변이 전혀 없는 주산면의 밤개(栗浦), 상서면의 나무개(木浦:古棧)가 있으며, 변산의 띠목(茅項), 활목(弓項), 한목(大項) 등의 목(項) 또한 포(浦)와 뜻이 같은 계열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

나루터는 단순히 사람들만이 왕래하는 도선장(渡船場)이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생활이 있고 생활이 있는 곳에 문화가 있듯이 다양한 문화가 마주치는 곳이 나루터다. 강밖의 문화와 강안의 문화, 외래의 문화와 내재(內在)의 문화가 나가고 들어오며 마주치는 곳이며, 그 매체는 이곳을 드나드는 형형색색의 사람들이다.

나루터 문화는 잡다하고 거칠며 시끄럽다. 신분 높은 벼슬아치도, 사대부집 내방마님이나 규방의 아씨도 이곳을 거쳐 가게 되고 상인, 천인, 불상놈도 여기에 모여 함께 나룻배를 탄다. 다만 지존인 임금은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하여 정조(正祖) 임금은 한강의 동작나루를 건널 때 배다리(船橋)를 가설하여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수원(水原) 능행(陵行)을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강변의 모든 배를 동작(銅雀)나루에 모아 연결하여 배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목판을 깔아 어가의 행렬이 건너게 하였는데 이때 이 배다리로 나룻배를 대신하게 한 아이디어를 내신 분이 정다산(丁茶山)이었다고 한다.

나루는 군사적 요새(要塞)의 기능도 하였다. 적군의 침공과 도강(渡江)을 막기 위하여 다리를 헐어버리거나 나룻배를 모두 불태워 버리기도 하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나루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요지에 포진(布陣) 방어하기도 하였다.

고려말의 우왕(禑王)초에 왜구들 50여 척이 보안현의 곰소(熊淵:검모포)에 침입하여 부령현까지 점령하고 고려의 토벌군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동진나루의 다리를 헐어버렸는데 이때 나세(羅世)와 변안렬(邊安烈) 두 장군의 토벌군이 밤에 동진나루에 다리를 가설하고 급습하여 왜구들을 섬멸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 제27권 열전(列傳) 나세(羅世) 조에 자세하다. 이 경우 동진나루는 부안지방을 방어 또는 침공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군사적 요충지였다 할 것이다. 또 1894년 갑오동학 농민항쟁 때 황토현의 싸움에서 크게 이긴 전봉준(全琫準)장군의 동학군이 백산(白山)에 모여 있으므로 관군이 이를 토벌하러 숙구지(禾湖里)에 포진하고 백산의 군개나루를 사이하고 대치하여 싸웠는데 군개나루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동학군에 의하여 크게 패한 것도 군사적 요충지의 기능이 컸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1950년의 저 처절했던 6.25동란 때 북한군에 밀려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하던 이승만정부가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한강(漢江)의 다리를 폭파하고 철수하는 바람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아비규환 수중고혼이 되게 하였다. 이리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며칠이나 멈추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고한 양민만 죽게 한 한강다리 폭파사건은 두고두고 한을 남긴 사건으로 남아 있다.

부안을 들고 나는 또 하나의 큰 나루는 주산면 덕림(德林)앞 모래뜸나루와 상터 가다리(蘆橋)나루였다. 이 길목은 고부군(古阜郡)을 거처 남부지방으로 드나드는 큰 길이였으며, 부령, 보안현은 옛부터 고부군에 딸려있었던 속현이였으므로 이 나루를 빈번히 이용하였었던 것이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  200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