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읍성의 성문거리 솟대당산들

 

▲서문안당산ⓒ부안21

마을 지킴이 신을 섬기는 민간신앙(1)

지금의 부안읍내는 조선조 태종(太宗)말 이후로 부안군의 행정 중심지인 치소(治所)였으며, 이 치소의 방호(防護) 성곽인 부안읍성이 평산성(平山城)의 원형 형태로 축조되어 1900년대 초까지 그 원형이 어느정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참담하리만큼 깡그리 훼철되어버려서 그 자취마저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앞의 <부안읍성(扶安邑城)과 그 문화> 제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이 부안읍성의 동서와 그리고 남의 세 곳 성문거리에는 돌을 깎아 세운 석조신간(石造神竿)의 솟대당산과 한 쌍씩의 돌장승이 조성되어 성안 사람들의 지킴이 신으로 바뜰어저 오고 있다. 이들 성문거리의 지킴이 신들은 성안 사람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 원화소복(遠禍召福) 그리고 자손의 번창과 풍농 풍요. 병마퇴치 등을 담당한 수호의 신으로 지금도 동문안의 당산거리에서는 그 신앙적인 제의의 행사가 잘 계승되어 오고 있다.

부안읍 성안 당산들의 신체(神體)와 당산제의는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에도 그 모형이 재현 전시되어 있으며, 서문 안 당산과 동문 안 당산은 보물급의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18호와 제19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어 오고 있고, 남문 안 당산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는 매우 귀중한 민간신앙의 문화재들이어서 민속학을 연구사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많은 관광객들과 외국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마을 공동체 신앙의 제의가 행하여지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당산(堂山)이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을 말하며 이 당산신을 모신 지역은 먼 옛날부터 마을의 성지(聖地)로 받들어 왔다. 우리 겨레들이 당산신을 모셔온 시원(始源)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먼 옛날 인류가 탄생되어 생활을 시작한 초기부터 자연신을 경외(敬畏)하면서 그 최고신인 하느님을 받드는 원시신앙의 하나가 아는가 여겨진다. 부족국가 시대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큰 행사는 하늘에 제사하는 일이었으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과 나라가 정사를 펴는 일은 같은 개념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하늘을 잘 받드는 제사 모시는 일이 바로 정사를 보는 일이라 하여 제정일치(祭政一致)라도 하였다.

당산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또 하나의 작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여겼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당산나무나 솟대의 신간위에는 하느님이 좌정하여 우리들을 굽어 살피고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래서 당산거리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이요 항시 정결하여야 하였다.

솟대당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우리 사서가 아닌 중국의 사서《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마한(馬韓) 조와 《후한서(後漢書》의 마한 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시절 우리나라는 아직 상고시대로(上古時代)로 문자가 없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나라마다 한사람의 천군(天君)이라는 사제자를 뽑아 천신(天神)에게 제사 하였고 각기 별읍(別邑)을 두고 이름을 소도(蘇塗)라 하였으며 긴 장대를 세워 거기에 방울을 달아 신을 받들었다.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懸鈴鼓 事鬼神….)」

이는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시대에 이미 충청․전라지방에 있었던 마한(馬韓)에서 하느님(天神)에게 제사한 내용의 기록이다. 「별읍(別邑)」을 소도(蘇塗 ).즉 솟대라 하였는데 이곳이 천신을 모신 곳으로 당산지역을 말하며 거기에 방울을 달아맨 긴 장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서 천군(天君)이라 부르는 사제자를 중심으로 하늘에 풍농을 감사하고 고을의 무사태평을 빌었다 하였으니 천군은 사제장으로 무당(巫堂)이며 방울을 단 긴 장대는 오늘의 솟대당산이다. 따라서 당산은 이와 같이 먼 역사적 뿌리에 바탕한 마을 지킴이의 천신(天神)이며 공동 신앙적 제의로 특히 충청․전라지방에 강하게 시행하여 왔던 우리겨레의 기층문화(基層文化)였다.

옛날부터 이 지방의 거의 모든 마을마다에는 그 마을을 담당하여 지켜 주는 지킴이 신을 받드는 당산이 있었고 해가 바뀌어 새해를 맞는 정초에는 마을의 축제를 겸한 당산제를 지내 왔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이후 급격히 산업사회로 변화 되면서 서구적인 문물에 밀려 우리 고유의 문물은 쇠퇴되고 특히 무격적인 민간신앙은 거의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 부안지방에는 아직도 20여 곳의 마을에서 당산제의가 잔존문화의 형태로 존속되어 오고 있음을 볼 수 있고 근래에는 일부 마을에서 끊겼던 당산제를 다시 복원하여 지내고 있는 마을들도 있는 추세다.

지금 당산제가 존속되고 있는 곳은 부안읍내 성안 당산제 중 동문안 당산제를 비롯하여 내요리 돌모산 당산제, 계화면 대벌리 당산제, 상서면 성암리 당산제, 하서면 섶못 당산제, 보안면 입석리 선돌 당산제, 우동리 당산제, 진서면 구진마을 당산제. 운호리 당산제.를 비롯하여 원암리 당산제, 작당마을 당산제, 변산면 수성당제, 띠목(茅項)당산제. 위도면 진말 당제, 대리마을의 원당제, 치도리 당제. 식도리 당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마을들의 당산지역을 살펴보면 마을의 주령(主嶺)이 아니면 동구(洞口)의 노거수(老巨樹) 당산나무가 있는 곳으로 노거수가 당산신의 신체(神體)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몇몇 마을은 솟대신간(神竿), 선돌(立石), 장승. 또는 짐대 등이 혼재된 마을들도 있다. 그리고 해안지역의 마을이나 섬에는 당산신을 주로 당집에 모시며 탱화(幀畵)를 신주(神主)로 한 곳이 많다. 당집에 모셔진 이들 당산신들도 그 기능면에서 볼 때 마을 수호의 기능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신격(神格)으로 이루어저 있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 2005·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