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제79권 조운(漕運) 조에 의하면 고려 국초에 보안현(保安縣)에 안흥창(安興倉)을 두었다고 하였다. 안흥창은 각 지방의 세곡을 거두어 국가에서 저장 관리하는 조운창(漕運倉)의 하나였다.
보안현에 있었다는 안흥창은 제안포(濟安浦)에 있다고 하였으며, 제안포는 전에는 무포(無浦)라 하였고<濟安浦: 前號無浦 保安郡安興倉在焉> 보안군에 안흥창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의 보안면 남포리(南浦里) 근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남포리 근처에는 지금도 옛날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창(社倉)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이 사창은 조선조 시대에 부안지방의 다섯 곳에 있었던 사창 중의 하나였다.
《고려사》에는 또 부안지방의 포(浦)에 관한 지명 세 곳도 보이는데 검모포(黔毛浦)와 여섭포(勵涉浦), 제안포(濟安浦)가 그것이다. 검모포에는 수군(水軍)의 진영(鎭營)이 있었던 요새지로 지금의 진서면 구진(舊鎭)마을 앞바다(곰소)며, 여섭포는 전에 주을(主乙)이라 하였는데 희안(希安)에 있다<勵涉浦: 前號主乙 在希安郡> 하였으니 주을(主乙)은 지금의 줄포(茁浦)이고, 희안군(希安郡)이라 함은 통일신라가 백제 때의 지명인 흔양매현(欣良買縣)을 희안(希安)으로 바꾼 보안의 옛 이름이다. 보안을 별칭으로 낭주(浪州)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제안포(濟安浦)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금의 보안면 소재지앞 바닷가 일대였을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사창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안현에 있었던 안흥창이 세곡(稅穀) 등을 걷어들여 갈무리한 조운창이었으니 당시 보안현은 물론이요, 아마도 부령현(扶寧縣) 일대의 세곡도 모두 이곳 안흥창에 받아들였다가 경창(京倉: 당시는 개경에 있는 국창)으로 운송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흥창에는 조운선 6척, 초공(梢工: 뱃사공)이 3인, 잡인(雜人: 허드렛일을 돕는 인부) 5인이 정원으로 배정되어 세곡 수납 수송에 임하였다고 하였으며, 9석의 양곡을 수송하는데 운임은 1석이었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조운창이 국세를 양곡으로 수납하였다가 경창으로 운송하는 일이 주된 기능이었다면 사창은 각 고을에 곳집을 두어 비축한 양곡을 춘궁기나 흉년에 백성들에게 꾸어 주었다가 가을에 받아들이는 국가의 구호 정책적인 성격의 창고였다고 할 것이다.
우리 부안지방에도 사창(社倉)이 다섯 곳에 있었다. 고을의 으뜸 사창을 본창(本倉)이라 하였는데 부안읍내 성안에 있었다. 옛 관아밑 지금의 부안군청 서편 공공도서관 부근에 있었는데 본창에서는 구휼적(救恤的)인 환곡(還穀)의 기능도 하였겠지만 관리들의 녹봉미(祿奉米: 봉급) 지급의 기능도 담당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그 다음은 북창(北倉)이라 하여 동진면 문포(文浦)에 하나가 있었으며, 서창(西倉) 또는 해창(海倉)이라 하여 하서면 부안댐의 입구 해창다리 옆에 있었고, 줄포에 남창(南倉)이 있었으며 보안면 사창리(社倉里)에 사창(社倉)이 있었다. 부안읍 성안에 있었던 본창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닷가의 포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성들의 구휼만이 목적이 아니고 세곡을 경창(서울)으로 수송하기 편리한 지역에 설치한 것으로도 보아진다.
사창제도(社倉制度)는 삼국시대에 중국 수(隨)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고구려로부터 시행하였던 의창(義倉)의 제도로서 원래 나라에서 평상시에 곡식을 비축하여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구제하였던 정부의 진휼정책(賑恤政策)의 일환이었다. 고려에 들어서도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이 제도를 이어서 흑창(黑倉)이라 하고 그대로 시행하여 왔으나 성종(成宗)때에 그 명칭을 의창(義倉)이라 고쳤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도 그 정책을 계속 시행하여 왔으나 점차 폐단이 많아지자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이를 폐지하고 진휼청(賑恤廳)을 두었다가 후에 세곡을 수납하는 사창(社倉)에서 환곡제도(還穀制度: 還子制度)라 하여 흉년이나 춘궁기(春窮期: 봄철의 절량기)에 백성들에게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갚게 하였는데 나중에는 이자까지 높여가며 받아냈으며, 관장과 토호들이 결탁하고 아전들의 농간이 자심하여지면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부안에는 이들 사창(社倉)외에도 소금을 제렴하는 벌막(筏幕)으로부터 세염(稅鹽)을 받아 저장하였던 염창(鹽倉)이 있었다. 지금의 계화면 창북리(昌北里) 앞 염창산(鹽倉山)의 남쪽 기슭에 있었는데 옛날에 대벌리(大筏里)를 중심으로 궁안, 삼간평 부근에서 많은 소금을 구웠다. 갯벌의 흙을 강한 햇볕에 태워 염도 높은 바닷물로 거른 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하였던 옛날의 제렴방식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그 맥이 끊어졌다. 대벌리의 지명은 염소(鹽所: 소금 굽는 곳)라고도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제151권 전라도 부안조에 의하면 소금을 굽던 염소(鹽所) 한곳, 소금세를 받는 염창(鹽倉)이 한곳 있다 하였고, 모두 현의 서쪽에 있다 하였으며, 공사(公私)의 벌막에 113인이 종사하였고, 봄․가을로 걷어들이는 세염(稅鹽)이 한해에 1,127석이라 하였다.<鹽所一: 在縣西, 鹽倉: 在縣西, 公私干幷一百十三人 春秋所納一千一百二十七名有奇>
이 기록으로 보아 대벌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미 소금을 굽던 벌등, 벌막이 크게 발달하여 왔음을 알 수 있고, 소금으로 하여 염소(鹽所), 대벌리(大筏里), 염창산(鹽倉山), 창북리(倉北里) 등의 지명이 생성되었으며, 이들 지명만으로도 그 일대의 역사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소금을 굽던 곳의 지명에는 벌(筏)자가 붙는다. 위도의 벌금(筏金)이나 전남의 벌교(筏橋)에서도 소금을 구웠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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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0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