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읍성의 성문거리에 조성된 당산의 신체는 오리솟대의 석간신주(石竿神柱)와 한 쌍씩의 장승으로 조성 배치되어 있다. 오리솟대당산 신간이 마을지킴이의 주신(主神)이요, 돌장승들은 주신을 돕는 보조기능의 하위(下位) 당산신장으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수문장격(守門將格)이어서 흔히 문지기장군이라고도 말한다.
당산신의 호칭은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호칭이다.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다. 당산신을 할아버지, 할머니로 호칭하는 것은 친숙한 가족 같은 개념으로 의인화(擬人化) 한 것이며, 마을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가장 어른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과 여 양성으로 호칭하는 것도 당산신이 부부로 이루어져야 다산(多産)과 풍요, 그리고 번창을 이룰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부부가 있어야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으며, 아이를 많이 낳는 일이 곧 생산이요, 풍요며 번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장승도 외짝의 독장승은 없다. 반드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며,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다. 대부분의 마을 당산이 웃당산과 아랫당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웃당산은 할아버지당산이고, 아랫당산은 할머니당산이며, 중거리당산이 있는 경우 이는 아들 당산이다. 따라서 당산신이 깃든 당산나무 또한 죽은 나무가 아닌 생목(生木)이어야 하고, 당산나무가 고사(枯死)하면 산나무로 교체하여 모신다.
이와 같이 당산신은 철저하게 부부로 조성되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로 받들었으며, 마을사람들의 구심체적 신앙체로 있으면서 마을문화의 중심체적 기능도 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당산의 기능은 마을사람들 간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여 주고, 화합과 단결의 계기가 되어주곤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부안읍 성안당산 중 서문거리의 당산은 이와 같은 다산적(多産的)인 구조면에서 볼 때 가장 짜임새 있게 그리고 완벽하게 조성된 부부당산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당산(主堂山인 솟대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 한 쌍이요, 그 하위당산인 돌장승도 상원주장군, 하원당장군 부부 장승이다. 더욱이 주당산의 오리는 알을 많이 낳으라고 그 바침돌 위에 아홉 개의 알받이 구멍까지 파 놓았는데 이를 섹스를 상징하는 성혈(性穴)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돌을 비벼 구멍을 파는 행위가 성적 교합(交合)의 행위라는 것이며, 이 성교적인 행위가 이들 당산신에게 생산, 다산, 풍요,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의 유감적(類感的)인 주술행위(呪術行爲)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당산제 때에 보면 그 알받이 구멍마다에 쌀을 소복하게 채워 놓고 제사를 지냈었다.
부안읍 성안당산의 조성배치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하기야 부안읍 성안당산처럼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성문안에 동구당산(洞口堂山)을 조성하여 세운 자료는 타지역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다. 고창읍내 오거리 갓당산은 모양성(牟陽城) 밖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마을들의 당산으로 1803년에 세운 풍수적 행주지형(行舟地形) 형의 비보적(裨補的)인 기능을 강조한 당산이지만 부안읍내 성안당산은 성을 중심으로 성문을 수호하도록 한 동구 수호의 기능을 강조한 당산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읍성의 동문과 서문 입구에 문지기 장군이라 부르는 석장승 한 쌍씩을 조성하여 세운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을의 원님이 정사를 펴는 관아를 중심으로 세 곳 성문과의 거리 또한 일정하다.
장승은 그 주된 기능에 따라서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침입하여 오는 병마나 역귀(疫鬼), 잡귀(雜鬼)와 도적. 또는 부정한 모든 것들을 물리치는 동구벽사장승(洞口辟邪長丞)과 길거리에 세워져 나그네에게 이정(里程)을 알려주고 여행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는 이정표장승(里程標長丞), 풍수신앙에 의하여 고을의 허한 곳을 비보(裨補)하는 읍락비보장승(邑落裨補長丞), 그리고 큰 사찰의 입구, 또는 그 주변에 세워져 여기서부터는 부처님이 계시는 거룩한 도장이니 살생을 금하며, 경건한 마음가짐을 일깨워주는 호법사찰장승(護法寺刹長丞) 등이 있는데 부안읍내 동문안과 서문 안 장승은 마을의 출입구를 지켜주는 동구벽사(洞口辟邪)류의 장승이다.
부안읍 성안당산의 조성 배치가 다분히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세웠다함은 세 곳 당산의 위치가 고을의 원님이 정사를 펴는 관아(官衙)를 중심으로 부챗살 형국을 이루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관아가 있었던 부안군청 뒤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를 기준으로 동문, 서문, 남문 안 당산과의 거리는 각기 약 300m 쯤이고, 성문들로부터는 안쪽으로 60m 쯤 되는 곳에 이들 오리 솟대당산들을 조성하여 세운 것이다. 성곽의 형태가 평산성이고 그 규모가 크고 넓어 그 허함을 당산 신에 의지하려는 계획된 배치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김형주
|
(글쓴날 : 200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