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에서 여몽 동정연합군 전함을 만들다-수군의 요충지 검모포진(黔毛浦鎭)

 

▲대동여지도, 검모포진이 표기되어 있다(청색 점선 안)

보안현(保安縣)의 검모포진영

지난 1999년 3월 20일 밤 8시 10분에 방영한 KBS1 텔레비전은 그 중후한 역사 스페셜 프로에서 『해상왕국 고려의 전함』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 방면의 전문적인 연구자, 역사학자와 고증의 자료들을 동원하여 다양하고도 구체적이며 과학적인 고증으로 재현 하면서 우리나라가 통일신라 말기 장보고(張保皐) 이후 고려시대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상권을 지배한 해상의 왕국이었음을 입증하여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1274년(충선왕:1년) 10월초에 몽고(蒙古;후에 元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몽 동정연합군(麗蒙東征聯合軍)을 편성하고 3만여 명이 900여 척의 수송 전함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하카타에 상륙하여 크게 무찔렀으나 일본인들이 이른바 가미카제(神風)라 하는 태풍을 만나 패퇴하고 돌아온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의 견고하고 우수한 전함(戰艦)과 수송선 900여 척을 전라도 부안의 변산(邊山)과 나주(羅州) 천관산(天冠山)에서 조선(造船)하였다는 사실과 그 조선소(造船所)가 지금의 부안군 진서면(鎭西面) 곰소 옆 구진(舊鎭)마을을 중심으로 한 검모포진 이었음을 실증 방영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역사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몽고와 고려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을 침공할 때 크고 작은 함선 900척(대선 300척, 중형선 300척, 보급선 300척)을 변산과 천관산에서 조선하였다는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제27권 원종(元宗) 15년 갑술(甲戌) 조에 자세히 밝혀져 있거니와 구체적으로 이들 전함을 조선한 조선소가 어디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변산에서 이들 배를 건조한 장소는 모든 여건으로 보아 진서면의 곰소 옆 바다 검모포진(黔毛浦鎭) 즉 지금의 구진(舊鎭)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리고 900척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의 목재의 물량과 고도의 조선기술들이 소요되는 전함들을 어쩌면 그 절반쯤을 변산에서 조선하였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어서 한번쯤 이를 따져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고려 중기부터 압록강 건너 북방의 초원 거친 황야의 유목민 몽고족이 급속하게 강성해지면서 중원(中原)을 휩쓸어버리고 동남아와 중앙아세아지방은 물론이요 멀리 유럽과 북구라파에 이르기까지 징기스칸의 말발굽으로 뭉개버리면서 역사상 가장 강대한 원(元)나라를 건설한 13세기 중엽, 고려는 원나라에 자주권을 내어주고 자신의 호흡마저도 제대로 못 쉬는 명맥만의 국가로 전락하여 버렸다. 크고 작은 항몽(抗蒙)의 전투가 곳곳에서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주권을 잃은 원나라의 한낱 부마국(鮒馬國)으로 전락하여 거의 한 세기를 그 발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원나라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라가 바다 건너의 일본이었다. 원나라 세조(世祖:쿠빌라이)는 고려를 향도자로 하여 여러 차례 사신도 보내고 조서(詔書:임금의 명령을 적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어 회유하였지만 당시 일본의 신정권의 실력자 북조시종(北條時宗)은 쿠빌라이의 오만한 조서와 태도에 강한 불만을 갖고 거절하곤 하였다.

이에 자존심과 체면이 크게 손상된 원(元)의 쿠빌라이는 일본정벌(日本征伐)을 결심하고 고려를 발판의 거점으로 하여 여․몽동정연합군(麗蒙東征聯合軍)을 편성하게 하고 전함(戰艦)과 수송선, 식량 모든 군수물자를 고려로 하여금 준비하게 명령하였으며, 거절할 수 없는 이 무리한 준비를 위하여 고려의 고초는 극심하였다. 여․몽동정군의 수송 전함 900여척도 이렇게 하여 변산에서 조선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일본과 고려와의 관계는 썩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편도 아니어서 고려 중기 이후에 일본의 몰락한 무인(武人) 집단이 해적(海賊)으로 전락한 이른바 왜구(倭寇)들이 가끔 우리의 연안을 노략질을 함으로 조정에서 일본막부(日本幕府)에 교섭하여 그러지 못하게 하였기에 일본을 침공할 이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침탈로 국력이 피폐하여 그럴만한 여력도 없었다. 다만 몽고의 강압에 부득이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려(高麗)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상(海上)을 지배한 해상왕국(海上王國)이었다고 주장하는 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말(統一新羅末) 청해진대사 무역왕 장보고(張保皐:弓福)에 의하여 이룩된 막강했던 해상지배권이 신라가 망하면서 많이 쇠퇴된 것은 사실이나 궁예(弓裔)의 신임을 받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의 신분과 배경을 보면 그 또한 수군(水軍) 출신인 백선장군(百船將軍,水軍大將)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도 해상무역상이었다고 하니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은 해상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지로 왕건(王建)은 수군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점령하고 영산강을 거슬러 당시 내해적(內海的)인 지형인 금성(錦城 :羅州)을 점령하여 견훤을 섬멸하는 교두보로 삼은 사람으로 해상무역가의 아들이고 수군출신인 그가 바다에 대하여 해박하게 알며 관심 또한 깊었을 것임으로 해상정책에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시대의 해상정책이나 선박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다. 고려 인종(仁宗) 때인 1123년에 송(宋)나라 사신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다양한 문물을 보고 글과 그림으로 남긴 서경(徐競:1091~1153)의 《고려도경(高麗圖經)》 제33권 주즙(舟楫) 조에 보면 당시의 배 4종류가 보이는데 순선(巡船), 관선(官船), 송방(松舫), 막선(幕船)이며 함선(艦船)이나 과선(戈船) 등의 전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 200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