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동정군의 전함을 건조한 검모포진

 

▲줄포항이 그랬던 것처럼 구진(검모포진)도 뻘이 차올라 포구로서의 기능을 이미 잃었다.ⓒ부안21

이제 여몽(麗蒙)의 동정연합군(東征聯合軍)이 제1차 일본 침공을 하였을 때 약 3만 여명의 연합군을 수송한 전함 9백여 척을 변산(邊山)과 천관산(天冠山)에서 건조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몽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사》의 충렬왕(忠烈王) 즉위년 10월초와 김방경전(金方慶傳)에는 몽고군이 2만5천명에 고려군이 8천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인 학자 이케우찌(池內宏)의 심도 있는 연구서(元寇의 新硏究)에 의하면 몽고군 2만 명에 고려군이 5천 3백 명으로 나타나 있다.

《고려사(高麗史)》 제27권 원종(元宗․15년․1274년) 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갑술(甲戌) 15년 봄, 정월에 원나라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보내어 전함 3백척의 조선을 감독하고 그 공장(工匠)과 일꾼, 일체의 물건(物件)을 오로지 본국(고려)에 맡겨 부담케 하거늘 이에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방경(金方慶)으로 동남도(東南道)의 도독사(都督使)를 삼았다. 원나라가 또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홍다구(洪茶丘)로 감독조선관군민총관(監督造船官軍民摠管)을 삼으니 다구가 정월 15일로써 역사(役事) 일으키기를 약속하고 재촉이 심히 엄하거늘 왕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허공(許珙)으로 전주도지휘사(全州道指揮使)를 삼고 우복야(右僕射) 홍록주(洪祿遒)로 전라도지휘사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羅裕)를 전라도에 김백균(金伯鈞)을 경상 도에, 박보(朴保)를 동계(東界)에 국자가업(國子可業) 반부(潘阜)를 서해도(西海道)에 장군 임개(任愷)를 교주도(交州道)에 보내어 각각 부부사(部夫使)를 삼아 공장(工匠), 역도(役徒) 3만5백 명을 징집하여 조선소에 나아가게 하니 때에 역기(驛騎)가 낙택하고 서무(庶務)가 번극하여 기한이 급박하매 빠르기가 뇌전(雷電)과 같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이 《고려사》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차 일본정벌(日本征伐)을 위한 준비로 수송 전함선의 건조를 전주도(全州道)의 부안(扶安:당시는 보안현(保安縣)이었지만) 변산(邊山)과 나주도(羅州道)의 천관산(天冠山) 등에 설치하도록 하고, 그 감독 책임자를 임명한 내용과 배를 만드는 목수와 그에 따른 일꾼(役夫) 3만 5백 명을 동원한 규모를 밝히고 있으며 일의 빠른 진첩을 위하여 독촉과 채찍이 가혹 하리만큼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관산은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다.

위의 내용 중 「전함 3백 척의 건조를 감독케 하거늘」의 3백 척은 실지로 전투에 임하는 대선(大船)인 전함(戰艦)을 지칭한 것이고 전함을 건조하는 기술자인 공장(工匠:목수)이와 일꾼들, 그리고 그에 따른 일체의 물자를 고려가 부담하도록 하여 고려의 목수들에 의하여 대선 3백 척, 중형선 3백 척, 보급선 3백 척이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선(大船)의 크기가 실지로 얼마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36보(步: 35m 내외)라 하였으며, 250톤 내지 280톤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크기가 상당하였으니 이와 같은 크기의 배 수 백 척을 변산에서 건조하였다고 볼 때 그 엄청난 양의 목재 수요를 변산이 감당하였을까 싶지 않으며, 주변 고창, 정읍 등 외지에서도 보급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리고 변산과 천관산의 조선소에만 함선 건조의 책임자를 임명한 것이 아니라 각 도에도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도록 동남도(東南道), 경상도, 동계(東界), 서해도(西海道), 교주도(交州道) 등 전국의 각도에 부부사(部夫使)를 임명하여 3만 5백 명에 이르는 많은 목수와 인부를 징집하여 서둘러 조선소에 보급하니 나라 안이 온통 들끓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급박하게 일을 다그쳤으면 「빠르기가 뇌전(雷電:번개)과 같았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앞의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는 원나라의 감독조선관군민총관(監督造船官軍民摠管) 홍다구(洪茶丘:준기(俊奇))와 고려의 장군 동남도(東南道)의 도독(都督)인 김방경(金方慶)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구진마을 당산제ⓒ부안21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준비 총 책임자격인 홍다구(洪茶丘)라는 자는 원래 고려사람으로 고려의 역신(逆臣)인 홍복원(洪福源)의 아들인데 처음 원나라와 싸울 때 그 아비 홍복원이 원나라에 항복하여 부자가 조국을 배반한 인물이다. 홍다구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 조정에 대하여 온갖 간섭을 다하고 괴롭혔으며, 삼별초의 난 평정과 일본정벌의 싸움에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참여하면서 김방경을 모함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등 귀양까지 보낸 인물이다.

김방경(金方慶․1212-1300)은 고려 후기의 명장이고 충신이다. 시호는 충렬(忠烈)이고 자는 본연(本然)이며 안동인으로 어려서부터 뜻을 학문에 두어 소년시절에 급제하였으나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싸운 이래 상장군(上將軍)이 되었으며, 진도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물리치고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하고 여몽동정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으로 용맹을 떨친 충신이었다. 그는 홍다구(洪茶丘)로부터 수차에 걸친 모함을 받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고 귀양까지 갔었으나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 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그 조국을 몽고인 보다도 더 혹독하게 괴롭힌 홍다구(洪茶丘)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나라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충성을 다한 김방경(金方慶)장군 같은 분도 있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 역사가 아니겠는가.

원나라 세조(世祖: 쿠비라이)의 빗발치는 독촉과 강압에 의하여 일본정벌의 준비를 마친 고려 조정은 1274년에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를 원나라에 보내어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였는데 나유(羅裕)장군이 원의 중서성(中書省 : 최고의 의정기관)에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의 내용에 변산(邊山)과 나주의 천관산(天冠山)에서 함선을 건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 3일에 대선(大船) 300척을 타조(打造)하라는 조지(朝旨:원의 명령)를 복몽(伏蒙)하와 곧 그 조치를 행하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허공(許珙)을 전주도(全州道) 변산(邊山)에, 좌복야(左僕射)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羅州道) 천관산(天冠山)에 보내어 재목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으로 도독(都督)을 삼아 관하(管下) 원장(員將)을 다 정련(精練)케 하고, 소용되는 공장(工匠)과 물자를 아울러 안팎에 준비토록 재촉하였나이다. 정월 15일에 이르러 모두 모여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일을 마치니 배는 대소를 아울러 900척을 완조(完造)하였고, 합용의 물자도 원활히 비축하 였으므로 삼품관(三品官)의 능숙한 자로 하여금 회박(廻泊)을 분관(分管)케 하여 이미 금주(금주:지금의 김해(金海))로 향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제상국(諸相國)은 잘 부주(敷奏) 하소서」

이때가 1274년 원종(元宗) 15년인데 6월에 원종이 죽고 원나라에 반 볼모상태로 가 있던 세자 심(諶)이 돌아와 즉위하니 이분이 충렬왕(忠烈王)이다. 그러니까 여몽의 동정연합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본을 침공한 것은 충렬왕 즉위 초년인 1274년 10월초이며, 전라도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된 수송 함선이 금주(金州 : 김해)에 집결하여 있다가 합포(合浦 : 馬山))에서 일본을 향해 출전한 것이다.

나유(羅裕)장군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274년 정월 3일에 원나라로부터 대선(大船) 300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고려는 즉시 보안현(保安縣)의 변산(邊山)과 나주(羅州) 고흥(高興)의 천관산(天冠山)에 조선소(造船所)를 설치하고, 각기 책임자를 임명하여 정월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9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을 불과 넉 달 반만에 건조해 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방경(金方慶) 장군을 감독으로 삼아 고려군의 장병들을 조련시키고 그에 따른 공장(工匠), 수수(水手), 역부(役夫) 등을 빈틈없이 동원시켰으며, 완성된 900척의 전함은 배를 능숙하게 잘 부리는 삼품관들로 하여금 운항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면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함들을 어떤 연유로 변산에서 건조하였으며, 변산의 어디에 조선소(造船所)를 설치하고 배를 건조하였을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조선소를 구체적으로 어디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의 모든 여건이나 정황으로 보아 보안현(保安縣)의 검모포(黔毛浦 : 지금의 곰소 앞바다)에 있었던 검모포진영(黔毛浦鎭營 : 수군의 기지)이 있었던 부안군 진서면 곰소 동편의 구진(舊鎭)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검모포진(黔毛浦鎭)은 서해의 서남연안을 지키는 수군(水軍)의 요충지로 수군의 진영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34권 부안현의 관방(關防) 조에 검모포진영(黔毛浦鎭營)의 기록이 보인다.「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라 하였다. 검모진영은 구진마을에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수군의 요충지, 물류의 중심지-검모포진

검모포진영(黔毛浦鎭營)이 있었던 구진마을이 당시 배를 만든 조선소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는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의 근거가 있다.

▲육이오 후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에서는 수백 년 동안 뻘속에 묻혔던 아름들이 못탕목이 수없이 발굴되었다. 못탕목은 1.5미터 깊이에 묻혀 있었다는데, 조선소의 도크처럼 넓게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못탕목을 꺼내 집도 수리하고, 땔깜으로도 쓰고, 심지어는 울타리 말구로도 썼다고 한다. 그 때 쓰고 남은 못탕목 한 토막이 마을 고샅에 나뒹굴고 있다.ⓒ부안21

첫째, 당시 변산은 행정적으로도 보안현에 속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사》 57권 지리(地理) 보안현 조에도 명확하다 「…별호를 낭주(浪州)라고 한다. 변산이 있고 위도가 있다.(…別號浪州, 有邊山 有蝟島)」라 하였다.

둘째, 변산반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지형적인 여건으로 보아 조선소를 설치하기에 검모포진만한 곳이 없다. 고창의 선운산 자락과 변산자락 사이에 넓고 길다란 만을 이루어 항시 잔잔한 물결과 깊은 수심, 그리고 널찍한 뻘판이 있다.

셋째, 수군(水軍)의 진영(鎭營)이 있는 곳이어서 함선을 건조하는 장소로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깊으며, 관에서 이 일을 추진하기에도 매우 편리하였을 것이다.

넷째, 울창한 수목이 무진장으로 있는 변산이 바로 진영(鎭營)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목재의 조달과 운송이 매우 편리하였을 것이다.

다섯째, 당시 검모포진영의 주변은 문물의 발달과 그 유통이 매우 활발하였다는 점이다. 12․13세기의 우리나라 도자기 공예의 찬란한 문화를 피어나게 한 곳도 검모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연안이었고. 세계적인 명품 상감청자도 검모포 연안에서 구웠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문물의 발달이 활발하였던 곳은 부령현이 아니라 보안현이었으며, 그 중심이 되었던 곳이 검모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줄포항(茁浦港)이 점차 매몰되어 가자 1938년에 구진(舊鎭)마을 바로 옆의 곰섬과 범섬을 인위적으로 매립 연결하여 곰소항을 개설하였는데, 이때 매립공사를 하면서 검모포진영(黔毛浦鎭營)이 있었던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 속에서 수백 년 동안 바다 뻘속에 묻혔던 아람들이 못탕목이 수없이 발굴되었는데 이 못탕목 일부가 지금도 구진마을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못탕목은 배를 건조할 때 밑에 까는 깔이목으로 이 못탕목 위에서 배를 건조한다.

이상과 같이 많은 전함을 건조하기에 적합한 자연적 여건이나 관리 지원상의 행정적 여러 조건들이 맞아 떨어지는 곳은 변산의 주변에서는 수군들의 진영이 있었던 검모포진영 말고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상 큰 일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인 이 구진(舊鎭)마을에는 지금도 옛 진영(鎭營)터에는 주춧돌만 뒹굴고 있을 뿐 마을 앞에 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글쓴날 : 200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