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을 점찍고 밀어붙인 작전이었다

    스웨덴에서는 1980년에 국민투표 결과를 수용하여 의회에서 최신 원자로의 수명이 다하는 2010년경에 현존하는 모든 원자로를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바탕으로 투명하고 민주적인 합의와 절차를 거쳐 지하 30미터에 있는 거대한 암석동굴에 중저준위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을 마련하여 1986년에 비로소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핵폐기장 부지 선정과정은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밀실에서 추진되는 하나의 ‘작전’이었다. 2003년 4월 21일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위한 담화문이 나간 이래 5월 1일 첫 공고가 나가고 5월 27일, 6월 27일에 잇달아 변경공고를 냈다. 거듭되는 변경공고를 면밀히 살펴보면 미리 …

새만금 방조제로 수몰되는 호남평야

  300mm 폭우에 바다가 된 호남평야 미국 홍수피해 도와주면서도 자국국민 나몰라라 뉴올리안즈 상세보도 제나라 식량창고 침수엔 침묵하는 언론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있는 호남지방에서는 벼농사를 짓기 위해 고대로부터 제방을 쌓았다. 익산의 황등제와 고부의 눌제, 그리고 김제의 벽골제가 바로 이들이다. ‘호남(湖南)’이라는 말은 바로 이 세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이라 한다. 벼의 고을이라는 뜻을 지닌 벽골제는 조선 후기까지 나라에서 관리하며 그 역할을 다했는데 ‘호남이 있어 조선 팔도가 흉년이 들어도 굶어죽지는 않는다.’ 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곡창 호남평야가 있는 동진강 수역에 지난 …

핵폐기장 후보지 위도를 가다

  8월 31일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부안군수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치신청이 무산됨으로써 부안 핵폐기장 문제는 끝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영덕에서처럼 또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부안 군민들의 반핵싸움은 국가의 거대한 조직적 폭력에 맞선 싸움이었다. 이들 조직에 전북 지역 국회의원, 건설업체, 관변학자들, 관변단체들, 지역언론, 광역자치단체장 등이 함께 했으며 ‘핵종규’로 불리는 부안군수는 이들에게 포섭당한 하수인에 불과했다. 부안에서 물러간 핵귀신은 인접 군산시와 포항시, 경주시, 영덕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하고 있다. 이제 차분하게 부안 반핵싸움을 돌아보고 이들 핵귀신의 행동방식을 하나하나 밝히고자 한다. 이 글들은 반핵싸움기간 동안에 …

쑥댓골 가는 길

  60년대엔 부안에도 버스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많았다. 쑥대골은 귀빠진 곳이어서 다니는 차가 없어서일까. 이곳에 갈 때마다 걸어다녔다. 옛 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성황산 밑의 한옥 마을 지나면 성황산 중턱의 띠처럼 이어진 산길에 들어선다. 산길은 짐승들이 다니던 길이었다는데 사람들이 노루랑 산토끼가 다니던 길을 빼앗은 셈이다. 성황산 끝물 신선마을 지나서 한가매와 고개를 넘으면 물 좋다는 옹달샘 만난다. 쑥댓골 가는 길 지비리 방죽은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산 위에서 봤을 때 방죽은 큰 그림처럼 보였는데, 어른들은 말같다고도 하고 용같다고도 했다. 방죽 옆 솔밭 …

영팔씨네 이발관에는

  평일이발관에 다닌지가 10년이다. 방학 때도 기필코 이 집에서 머리를 손대야 개운하다. 이 곳에 대한 추억은 ‘연탄난로는 이발관에서 만난다’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1980년대가 이 집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의 정치 상황과는 다르게 마음이 끌린다. 3주에 한번씩은 가는데 지역 소식을 뭉뚱그려 들을 수 있고 궁금해하는 사실이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얘기를 이 집에 오면 곱배기로 담을 수 있다. 주인은 말씨조차 조용조용하고 남의 좋은 점을 얘기하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16살부터 이발을 배우다 영팔씨는 47년생으로 백산에서 출생했는데 동진에서 자랐고 마을에서 16살부터 이발을 …

부안은 물의 나라

  부안 속담 중에 “비(雨)는 쫓고 눈(雪)은 잡아맨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비에 비해서 눈이 많이 온다는 뜻이지 비가 적다는 것은 아니다. 부안은 서해 바다와 고부천, 동진강으로 둘러 싸여 독립된 나라처럼 보이고 물산과 농산물이 풍부했지만 여름 장마철에는 홍수가,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에 시달렸다. 집 옆에 바다 있다 부안읍 중심부에 있는 수협 옆을 깊게 팠을 때, 개흙(바다 흙)이 나왔다. 부안 지역에는 쉽게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부안 들어가는 초입의 행낭골 모정에는 배를 맸다는 큰 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진성아파트 있는 주변은 매기가 …

나루터에 묻혀있는 민초들의 이야기

  부안읍내를 중심으로 서울이나 전주방면을 가려면 우선 부안읍성의 동문인 청원문루(淸遠門樓)를 나서야 한다. 동문인 청원루 성문거리에는 돌솟대의 오리당산과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한쌍의 수문장격 부부 장승이 조성되어 있어 성안사람들의 안위를 수호하고 있으며 동문을 나서 덕다리 방죽을 지나면 장승백이다. 장승이 박혀 있는 곳이란 뜻의 지명으로 지금은 장승의 흔적은 없지만 나그네의 이정(里程) 안내와 여정을 수호하는 노신격(路神格) 장승이었다. 지금의 해성병원 앞 언덕배기다. 장승백이를 지나 고마제 방죽을 좌측으로 하고 동진장터를 지나면 청운동의 동진원(東津院)에 이른다. 원(院)이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제도로서 통행의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나라에서 원을 두어 공무로 …

부안의 큰 대문 동진나루

  지금 동진대교가 놓여진 동진강 하구에 있었던 옛 나루터는 먼 옛날부터 부안고을의 시작이요 이곳을 드나드는 첫 대문이었다. 부안 사람들이 전주나 서울등지로 나들이 할 때도 이 동진나루를 건너 죽산(竹山)을 지나 내재역(內才驛)을 거쳐 김제, 금구 또는 이서를 지나 전주에 갔으며, 또 울렝이(鳴良里)의 해창을 지나 만경의 사창나루를 건너 임피(臨陂)의 소안역(蘇安驛)으로 하여 충청도 논산 땅을 지나서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마찬가지로 외지의 사람들이 부안을 찾을 때에도 부안을 중심으로 동북지방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진나룻배를 타야 들어올 수 있었으니 동진나루는 부안의 대문이었고, 교통의 요지였으며 나루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

봉래동천(蓬萊洞天)

  묻혀있는 유물이나 사료들을 발굴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망실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정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나 유적들의 보존조차도 부실한 곳이 많고 비록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지정문화재 외의 자료들에는 거의 눈도 돌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부안의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안타깝게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안군청 뒤 옛 관아(官衙:오늘날의 군청 청사) 앞 진석루(鎭石樓)가 있었던 반석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봉래동천(蓬萊洞天)”이라는 초대형의 초서(草書)와 그 아래 해서(楷書)로 쓴 “주림(珠林)”, 그리고 예서(隸書)로 쓴 …

[이용범 연작 시] 지운 김철수2 – 당신 말년 지독히 가난했지만…

  한학자 서택환을 만나다 “김철수는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동진강 수로가 닿는 곳으로 아버지는 쌀 위탁판매업을 하는 넉넉한 소지주였고 재주가 있는 이들의 교육에 열성이었다. 그 당시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 군수를 지내다 부모 상(喪)을 당하여 군수직을 사직한 서택환이 서당을 열고 있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서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웠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됐다. 서택환은, “우리나라가 다 망해 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후일, 사상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고 묻자,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