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동천(蓬萊洞天)

 

묻혀있는 유물이나 사료들을 발굴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망실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정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나 유적들의 보존조차도 부실한 곳이 많고 비록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지정문화재 외의 자료들에는 거의 눈도 돌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부안의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안타깝게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안군청 뒤 옛 관아(官衙:오늘날의 군청 청사) 앞 진석루(鎭石樓)가 있었던 반석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봉래동천(蓬萊洞天)”이라는 초대형의 초서(草書)와 그 아래 해서(楷書)로 쓴 “주림(珠林)”, 그리고 예서(隸書)로 쓴 “옥천(玉泉)”의 여덟 글자다. 서예를 하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물의 운치를 알고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하나같이 천하의 명필이라고 찬탄하여 마지않는 이 글씨는 조선조 순조(純祖)때인 1810년에 부안의 현감(縣監)오늘날의 군수으로 부임하여 1813년까지 근무했던 박시수(朴蓍壽)라는 분이 쓴 글씨다.

이분은 후에 참판(參判)에까지 오른 분인데 이 글씨에 대한 기록은 1932년에 간행된 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에 자세하게 밝혀져 있는데 관사공해(館舍公力) 조의 진석루(鎭石樓)에 이르기를 “진석루는 관아의 외삼문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다락의 아래 반석위에는 참판(參判) 박시수(朴蓍壽)가 쓴 ‘주림옥천 봉래동천’의 여덟 글자가 남아 있다(鎭石樓: 卽外三門在官衙前 今廢 樓下盤石上 參判 朴蓍壽書 珠林玉泉 蓬萊洞天 八字)”라 하였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두 자씩의 초서로 “蓬萊洞天”이라 썼는데 두 글자의 연장 길이가 가로 404㎝, 세로 523㎝에 이르고 글자 획의 평균 굵기는 15㎝쯤에 달하는 초대형의 글씨로 이와 같은 대형의 명필글씨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씨로부터 남동쪽으로 20여m 쯤에 역시 그가 해서와 예서로 쓴 ‘珠林’과 ‘玉泉’ 네 글자가 조금 사이를 두고 각자되어 있는데 글자의 크기는 각기 40㎝ 내외다. 아마도 서림(西林)의 샘물이 흘러내려 옥천(玉泉)을 이루니 선인(仙人)들이 사는 봉래동천이 아니겠느냐는 뜻이 아닌가 여겨진다.

봉래(蓬萊)라는 말이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에서도 으뜸산인 봉래산을 이름이요 이는 곧 변산을 지칭하는 말일 뿐만이 아니라 부안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천(洞天)이란 말 역시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로 둘러싸인 땅이라는 뜻으로 부안의 아름다움을 신선들의 세계에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수년 전에 향토사를 연구한다는 어느 실없는 분이 이 글씨들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글씨라고 증언하여 <서림공원금석문조사(西林公園金石文調査)를 할 때 혼란을 준 일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있어 유감이다. 창암의 유수체(流水體) 초서 한 폭도 구경조차 하여보지 못한 분의 엉터리 증언이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음이다.

이 보배로운 금석문(金石文)들이 지금 흙 속에 묻혀 있거나 그 글씨 위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문화유산의 유린과 파괴행위가 이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시급한대로 벽돌로 담장이라도 둘러쳐서 글자가 망가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은 우리 고장의 정신문화적인 자산이요 자랑이며 관광의 큰 자원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글씨를 보기위하여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그리고는 실망감과 허탈감으로 돌아가면서 심한 경우 욕설까지 퍼붓고 가는 사람을 뉘라서 탓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와 같은 서글픈 문화풍토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한스럽고 불쌍할 뿐이다.


글쓴이 : 부안21
작성일 : 2003년 07월 08일 08시 2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