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동진대교가 놓여진 동진강 하구에 있었던 옛 나루터는 먼 옛날부터 부안고을의 시작이요 이곳을 드나드는 첫 대문이었다.
부안 사람들이 전주나 서울등지로 나들이 할 때도 이 동진나루를 건너 죽산(竹山)을 지나 내재역(內才驛)을 거쳐 김제, 금구 또는 이서를 지나 전주에 갔으며, 또 울렝이(鳴良里)의 해창을 지나 만경의 사창나루를 건너 임피(臨陂)의 소안역(蘇安驛)으로 하여 충청도 논산 땅을 지나서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마찬가지로 외지의 사람들이 부안을 찾을 때에도 부안을 중심으로 동북지방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진나룻배를 타야 들어올 수 있었으니 동진나루는 부안의 대문이었고, 교통의 요지였으며 나루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부안고을의 순후한 정감과 아름다운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교통로가 매우 발달하여 시원하게 뚫린 아스팔트길에 강나루에는 다리를 놓았고, 산길 험한 고갯마루는 깎아 내리거나 터널을 뚫어 나루터는 거의 없어지고 고개를 넘는 어려움도 사라진지 오래여서 3․40년 전의 나루터 이야기도 이젠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옛날 부안을 드나드는 나루터는 동진나루 말고도 삼개나루, 군개나루, 상터나루 등이 있었다.
삼개나루는 동진나루에서 백산 쪽으로 중간쯤에 있었던 교통이 빈번하지 않은 작은 나루터였고, 군개나루는 백산에서 태인 방면으로 드나드는 나루였으니 갑오동학란 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황토현(黃土峴)싸움에서 승리한 뒤 백산에 웅거하며 삼월기포(三月起包)를 준비할 무렵 태인 방면으로부터 공격하여 온 관군이 수곶이<화호(禾湖)>에 진을 친 후 군개나루를 사이하고 동학군과 일전을 하여 대패했던 곳이기도 하며, 당시 부안 사람들은 이 싸움 구경을 갔다가 대포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논두렁 밑에 엎어져 있다가 돌아왔다는 고로(古老)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나루터다.
그리고 상터나루는 정읍 영원면과 부안 백산면, 주산면 접경 고부천의 나루로 고부나 정읍 방면으로 출입하는 나루인데 가다리(蘆橋)가 무너지면 나루로 건넜던 곳이다. 고부군은 1914년 일제의 조선 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없애 버린 군이지만 삼국시대부터 백제 오방(五方)의 하나로 남부지방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부안은 고부의 속현(屬縣)이었다.
동진나루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 먼 옛날 사람들이 부안고을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문화가 형성되면서 필요에 따라 외지로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뗏배나 나룻배로 강을 건넜을 것이고, 부족사회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적 정부형태가 시작되었던 백제 때부터는 교통의 양이 크게 증폭하면서 나루터의 교통이 활발하게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이미 동진나루에 다리가 놓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중종(中宗)때에 완성된 관찬의 인문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34권, 부안현의 교량(橋梁)조에 보면 동진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동진다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동진교(東津橋):동진의 위쪽에 있다. 신우 초년에 왜선 50여척이, 웅연:(지금의 곰소)에 침입하여 적현(狄峴):(지금의 호벌치 재)을 넘어서 부령현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가 변안렬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다」(東津橋:吊津上 辛禑初 倭船五十餘隻 來海熊淵 踰狄峴 寇扶寧縣 毁東津橋 使我兵不得進 上元帥羅世 與邊安烈等 夜築橋 分兵擊滅 遂大波之) 여기에서 신우초라 한 것은 고려의 제32대 임금 우왕(禑王) 5년을 말하며 1379년의 일이다.
우왕을 굳이 신우(辛禑)라 한 것은 우왕이 왕씨의 손이 아니고 중 신돈(辛旽)의 아들이란 뜻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왜구들이 지금의 진서면 곰소로 침입하여 유정재를 넘어 부령읍(당시는 부령현의 치소가 지금의 행안면 역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까지 점령하고 고려의 토벌군이 쉽게 오지 못하도록 동진교를 헐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으니 고려 때에 이미 동진나루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세(羅世)장군의 지휘하에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건너 야습을 감행하여 왜구들을 공격하니 왜구들이 대패하여 행안산(幸安山)으로 도망하므로 이를 포위하여 섬멸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 제27권, 열전(列傳), 나세(羅世)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무렵에 왜놈들의 해적 떼거리 왜구(倭寇)들의 우리나라 노략질이 극심하였으며, 우리 부안도 위도를 비롯하여 해안 마을들은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편안 잠을 잘 수 없었으니 동진나루터도 일찍부터 그 수난의 한 역사를 겪은 것이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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