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속담 중에 “비(雨)는 쫓고 눈(雪)은 잡아맨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비에 비해서 눈이 많이 온다는 뜻이지 비가 적다는 것은 아니다. 부안은 서해 바다와 고부천, 동진강으로 둘러 싸여 독립된 나라처럼 보이고 물산과 농산물이 풍부했지만 여름 장마철에는 홍수가,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에 시달렸다.
집 옆에 바다 있다
부안읍 중심부에 있는 수협 옆을 깊게 팠을 때, 개흙(바다 흙)이 나왔다. 부안 지역에는 쉽게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부안 들어가는 초입의 행낭골 모정에는 배를 맸다는 큰 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진성아파트 있는 주변은 매기가 많이 잡히는 읍내방죽(일명계호, 괴재, 남밖의 방죽)이었는데 가뭄이 들어도 가물치는 수초 사이에 숨어서 질긴 목숨을 부지하였다. 행안 쪽의 부안예술회관은 아라지라는 큼지막한 방죽 자리였고 혜성병원 밑의 덕천방죽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부안 읍내는 성황산 밑 돌팍거리나, 현재 군청을 중심한 지역 외에는 큰 방죽이 자리한 늪지대요 바닷물이 밀려와 집 앞까지 찰랑거린 바닷가라고 할 수 있다. 부안은 성황산이나 덕천마을의 망기산 정도와 몇 개의 구릉을 제외하고는 물이 가득 찬 방죽과 바닷물에 휘감겨 있었다.
사람들은 물에 휘감긴 작은 섬처럼 된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앞개울에서는 민물고기를, 집 마당까지 들어오는 바닷물에서는 해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토방까지 올라온 농발게를 소리치며 몰고 다니고, 고샅의 이곳저곳에서는 바다고기와 산나물과 곡식들을 흥정하는 남루한 옷을 걸친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그려본다. 그러나 해산물은 곡식 가격과는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지게로 물고기를 무겁게 한 짐 가득 지고 가도 겨우 보리 몇 되와 바꿀 뿐이었다.
강.기들.포구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은 고부와 영원, 주산, 백산으로 흘러 동진강으로 합쳐졌다가 서해로 빠진다. 이 곳을 지금은 구개(옛날 갯벌)라 부르고 들판인 백산면 덕신마을을 개건너라 했다. 해평리(蟹坪里)를 기들이라 부른다. 이곳에서는 바닷게를 기라고 부르니 게가 많았던 들판이란 말인데 갯가를 막아서 논으로 만들었는데도 오랫동안 게들이 넘나들어서 기들(蟹坪)이라고 얘기했다.
부안에서 바다와 관계된 포구의 이름은 격포(格浦), 석포(石浦), 줄포(茁浦), 세포(鳥浦), 회포(回浦), 목포(木浦) 등 29 개의 지명이 남아 있고 지역의 위치로 보아 어선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내륙 깊숙이서 포구를 형성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고 상업활동이 가능했다. 주변에는 늪지대와 갈대가 많았고 고잔(곶안)은 포구의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는 지명으로 만 남아 있다. 포구 주변은 바닷물을 막으면 몇 식구는 먹을만한 농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나 세금을 못내고 도망한 사람, 피난민들이 손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산과 포구에 살다
부안은 변산이 있고 바다물이 들어오는 갯골이 많아서 농사짓는 농토가 부족하자 바닷물이 닿지 않은 산기슭의 다랭이 밭을 일구는 수고로 밭농사를 지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산간 구릉의 자갈을 치우고 나무 뿌리를 캐내고 잡초를 다스려 산전(山田)을 일구었다. 산전의 개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저습지나 간척지 개발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 15년(1791.8.10)에 부수찬 이우진이 상소하기를
“부안 고을은 사방이 변산 기슭에 둘러싸이고, 3면은 해변에 바싹 닿아서, 온 경내의 백성들이 산에 살지 않으면 포구에 사는데 근년이래 마을이 잔폐하여 7·8집은 비어서 산전(山田)은 태반이 묵정밭으로 황폐해지고, 해세(海稅)는 해마다 줄어드는데, 이는 오로지 백성은 적고 관이 많아서 백성이 관의 침해를 감당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관의 폐해를 짊어지고 사는 백성들의 힘든 모습과 마을이 사라지는 모습도 찾아본다. 산이나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들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을 보면 산전이나 포구에서 농사를 지을만한 여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산·들·바다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부안 사람들은 산과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다.
홍수와 흉년에 시달리다
순조 원년(1801, 7, 25)의 실록기사에는 “진도·부안 등 고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 145명에게 특별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홍수로 인해 목숨까지 잃게된 지역 사람들의 힘든 삶의 흔적인데, 7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엔 못산다는 옛 분들의 속담을 생각하게 한다.
갯벌이나 강가라는 지역적 여건 때문에 홍수나 해일로 인한 피해는 막기 어려웠다. 일제 시대에도 백산면의 송월리와 신평리 등은 홍수가 나서 마을이 고립되면 지붕에 올라가서 징을 쳐서 알렸고 면에 있는 목선을 이용하여 고립된 사람들을 구했다. 이러한 피해지역은 과거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갯벌 지역으로 신평리와 죽림리는 일제 시대 진구지 갑문 공사로, 원천리는 동진강 직강 공사 등으로 상습적인 피해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교 갑문이 만들어지면서 바닷물을 막아 상서지역과 하서지역도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 되었다.
백성이 없어진다
고종15년(1878, 7, 29)에 영의정 이최응이
“방금 전라 전 감사 이돈상의 보고를 보니 ‘부안현은 병자년(고종13년, 1876)의 흉년과 정축년(고종14년)의 전염병이 8도에서 가장 심하여’, 이제 조세를 재촉하면 앞으로 백성이 없어지게 될 형편입니다.”
앞의 정조 15년의 기록에서도, 마을이 잔폐하여 7·8집은 비어서 산전(山田)은 태반이 묵정밭으로 황폐해지고, 해세(海稅)는 해마다 줄어드는데, 이는 오로지 백성은 적고 관이 많아서 백성이 관의 침해를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안은 이제 사람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라고 중앙에 보고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민란으로 발전하였다. 철종 13년(1862, 5, 21)의 기록은 “부안현 백성 1000여명이 선무사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아전을 발로 차서 죽이고… ”
1862년이면 임술민란(진주민란)이라 하여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1862년 2월에 진주(晋州)에서 처음으로 폭발한 민란은 전국 각지의 주요 고을로 번져갔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15개 고을에서, 전라도는 부안을 포함하여 9개 고을에서 정부 관료층과 농민의 대립, 지주와 전호와의 대립이 날카로웠다.
부안은 물의 나라, 큰 섬 같은 땅이다. 서해바다와 동진강과 고부천으로 둘러 싸여 있어 물이 주는 편리함과 풍성함을 얻을 수 있었지만, 물 때문에 고립되고 고통을 겪었을 민중들의 아픔의 흔적이 이 곳 저곳에 남아 있다. 이런 흔적들은 부안 사람들의 아픔과 처지를 소리 없이 보여주지만 민중들이 남긴 말과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후세인들이 뜨거운 가슴과 상상력으로 느껴야 할 부채이다.
글쓴이 : 정재철
작성일 : 2003년 07월 02일 06시 3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