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팔씨네 이발관에는

 

평일이발관에 다닌지가 10년이다. 방학 때도 기필코 이 집에서 머리를 손대야 개운하다. 이 곳에 대한 추억은 ‘연탄난로는 이발관에서 만난다’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1980년대가 이 집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의 정치 상황과는 다르게 마음이 끌린다. 3주에 한번씩은 가는데 지역 소식을 뭉뚱그려 들을 수 있고 궁금해하는 사실이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얘기를 이 집에 오면 곱배기로 담을 수 있다. 주인은 말씨조차 조용조용하고 남의 좋은 점을 얘기하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16살부터 이발을 배우다

영팔씨는 47년생으로 백산에서 출생했는데 동진에서 자랐고 마을에서 16살부터 이발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큰 마을에는 이발관 하나씩은 있었다. 이 때만해도 이발기술을 배우기 위해 아이들은 줄을 섰다고 한다. 머리 감겨주는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 집도 있었단다. 그 때는 재워주고 먹여 주고 입혀주는 집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이 중에서 먹여주는 집만 있어도 감지덕지였다.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식구 많은 집에는 큰 걱정거리 하나는 던 것이다.

영팔씨는 지역에서 군 생활을 끝낼 수 있는 제2국민 보충역이었는데, 갑자기 군대 영장이 나오는 통해 호소 할 길도 없이 군 생활을 쫀쫀이했다. 군대 갔다온 사람들이 꿈마다 억울한 군 생활을 두 번씩이나 하는 갑갑함을 경험하는데, 영팔씨는 꿈이 아닌 생시에 이런 일을 겪었으니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며 억울해 한다.

전주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다가 군에 갔다 와서 평교에 자리를 잡았고 같은 골목에서 미장원을 하는 아내와 만나 결혼을 했다. 지금 자리는 평교 장터로 일본식 집이다. 민생약국 집을 사서 85년에 이발관으로 만들었다. 이발로 아이 둘을 대학까지 가르쳤다.

이발관에서 만나는 반가운 풍경

이발관에서 반가운 풍경을 본다. 의자에 앉으면 두꺼운 가죽띠를 만난다. 예전에는 여기에 면도를 쓱쓱 문대서 면도날을 세운 뒤 사용했다. 지금은 일회용 면도날을 쓰기 때문에 별 필요가 없는데도 지금까지 그 자리에 걸려 있다. 먼지에 쌓인 빨간 별표가 여전한 오래된 금성 라디오도 있다. 지금도 소리는 또렷하여 옛날 동무를 만난 듯 반갑다. 최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라고 걸려 있는 액자는 80년대 초에 유행했던 머리 모양이다. 영팔씨가 이것을 보고 머리 손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발관 그림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빨래하는 아줌마와 초가집 지붕에는 박넝쿨이며 빨간 고추가 마당에 널려 있다.

이발기구를 넣어두는 장식장도 옛날 그대로이고 드라이기계도 이제는 찾기 힘든 옛날 것을 고무로 묶어 쓴다. 연탄난로에 고대를 얹어서 뜨겁게 달군 다음 쓴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은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영팔씨는 이런 기구들을 기름에 덧칠해서 종이로 싸서 보관하고 있다. 시내버스 시간표를 적어 붙인 빛 바랜 시간표도 반갑다. 잉크로 꼼꼼히 적은 밑으로 컴퓨터로 깔끔하게 만든 시간표도 같이 있다. 아마도 둘 째 아들이 컴퓨터로 만들어준 모양이다. 지금은 그 시간이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다양한 용도의 연탄난로

연탄난로는 이제 평일이발관에나 와야 만날 수 있다. 연탄불로 물을 데우고 난로가 내는 따뜻함이 이발관 안을 푸근하게 한다. 연탄난로의 몸과 연통에는 하얀 비누거품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붓 솔에 비눗물을 찍어서 이곳에다 문질러 따뜻하게 만든 다음 얼굴에다 비눗물을 묻혀서 면도를 하는 경제적인 방법이 아직도 이 집에 남아 있다.

바리깡이라고 불리는 머리를 짧게 깎는 이발기는 진열대에 있지만 전기로 된 기계 이발기가 대신한다. 초등학교 때 머리를 빡빡 깎는데 7원 이었을 때, 이 돈이 없어서 고추 자르고 손톱도 자르는 가세(가위)로 머리를 깎는 동무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땀나게 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층이 난 머리가 보여서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뛰어다니면 귀한 신발이 닳아지니 어쩌지?

이발관은 생활공간·박물관

이곳에 놀러오는 분들은 실내에서는 담배를 아예 피우지 않거나 추운데도 문 정도는 열어놓고 피운다. 이발관이 오소리 잡듯 연기가 가득했던 것도 그리운(?), 이젠 볼 수 없는 추억이다.

이발관에서 자주 노는 아저씨들과는 아는 체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분들은 한가할 때 이발관에서 고스톱을 친다. 돈이 오가는 놀이가 아니고 점수 내기를 해서 박카스를 사먹는 등 연일 화기애애하다. 인사하는 아저씨 가운데는 딸아이가 우리학교 3학년에 다니는 학부형도 있다. 주변 얘기는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농사도 제법 짓는다고 귀뜸한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딸아이 얘기는 하지 않지만 입시에 대한 정보나 의견을 은근히 듣고자 한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누구 학부형이냐고 묻기는 어려운 일이고.

밤에는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데 딸아이의 엄마가 일하느라 피곤한데도 후문에서 아이를 기다린다. 학교 근방에 살지만 아이에게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그것보다는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딸아이를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며칠 전에는 눈이 오고 바람이 몹시 불면서 추웠다. 후문에 이 여학생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서 왜일까 했는데, 교실에서 여학생이 나오자마자 이발관에서 보던 아저씨는 어둠 속에서 잽싸게 나와서 검은 오바를 딸아이에게 덮어씌웠다. 딸아이는 부끄러웠는지 손사래를 쳤다. 딸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저씨의 흐뭇한 뒷모습을 보았다.

강원도 영월에 다녀온 사람들 얘기는 그 산골에 무슨 박물관이 그리 많은지 하고 감탄한다. 평일이발관에 들어서면 이곳이 바로 지난 역사이고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팔씨처럼 평범하게 사는 분도 옛날을 즐거이 살며 불편을 조금 감수하면 자연스런 박물관 하나를 가질 수 있다. 지자체에서 이런 데에 착안하면 좋은 꺼리들이 많을 텐데. 글쎄 우선 화려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관심 갖기도 쉽지 않을테니 세수(稅收)가 어떠니 하면 말 길을 잃어버린다.

80년대를 추억하며 박물관 하나쯤 소박하게 꾸며 보고픈 욕심을 가져본다.


글쓴이 : 정재철
작성일 : 2003년 07월 08일 06시 5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