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는 1980년에 국민투표 결과를 수용하여 의회에서 최신 원자로의 수명이 다하는 2010년경에 현존하는 모든 원자로를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바탕으로 투명하고 민주적인 합의와 절차를 거쳐 지하 30미터에 있는 거대한 암석동굴에 중저준위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을 마련하여 1986년에 비로소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핵폐기장 부지 선정과정은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밀실에서 추진되는 하나의 ‘작전’이었다. 2003년 4월 21일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위한 담화문이 나간 이래 5월 1일 첫 공고가 나가고 5월 27일, 6월 27일에 잇달아 변경공고를 냈다. 거듭되는 변경공고를 면밀히 살펴보면 미리 부안을 점찍어 놓고 ‘작전’을 전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시인하였다.
양성자가속기와 핵폐기장 연계 (2003년 4월 21일 공고)
정부는 2003년 2월 4일 국무총리 주재로 원자력위원회를 열어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건설 후보지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 후 후보지로 오른 영덕, 울진, 영광, 고창에서 “핵폐기장 결사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성명서가 잇따랐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4월 15일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선정을 더이상 늦춰서는 안될 것”이라며 “지방자치단체와 대표성 있는 주민들이 합의해서 부지선정을 신청하면 양성자가속기사업 유치에 가산점을 주는 등 연계해서 추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정부와 한수원은 4월 21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주요 일간지에 담화문을 냈다. 10개 부처 장관과 한수원 사장 등 11명의 공동명의로 낸 이 담화문은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을 유치하는 지역에서 양성자가속기사업을 신청하는 경우 특별가산점을 주고 신청지역의 발전을 위해 획기적으로 지원하겠다”며 “3,000억원의 지역 지원금을 제공하고 주민에 대한 직접 지원도 확대하겠다”고 하였다.
당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양성자가속기사업을 유치하면 연간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 이상에 이르고, ‘첨단산업의 메카’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선점하게 된다”고 주민들에게 홍보하면서 저마다 우리 지역이 최적지라며 유치전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언론에서는 “핵폐기장을 양성자가속기에 끼워 판다”고 표현하기까지 하였다. 동해안의 고성, 양양, 울진, 영덕, 영일, 남해안의 장흥, 강진, 완도, 서해안의 진도, 영광, 고창, 보령, 안면도, 굴업도 등 전국의 해안에서 퇴짜를 맞아온 핵폐기장이 획기적으로 지역발전을 이룰 ‘선물’로 둔갑하여 주민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4개 후보지 외의 지역에서도 신청 가능 (2003년 5월 1일 공고)
이어 5월 1일자〈대한매일〉에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 확보사업과 양성자기반 공학기술 개발사업 연계추진”이라는 제목 아래 이의 유치를 안내하는 공고가 과학기술부 장관과 양성자기반 공학기술 개발사업단장, 그리고 산자부 장관과 한수원 사장의 이름으로 실렸다. 울진, 영덕, 고창, 영덕에서 신청하면 우선 선정한다는 것과 기존의 양성자가속기사업 유치신청을 한 지역에서 핵폐기장 유치신청을 하려면 추가로 핵폐기장 유치신청서를 내면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핵폐기장 후보지로 오른 지역에서의 반대 불길은 사그러들 줄 몰랐다. 이 무렵 부안의 위도에서는 낚시꾼으로 가장한 ‘박사’로 통하는 사람이 나타나 주민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는 5월 9일 위도 주민 80여명을 관광버스 2대에 태워 인솔하고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차 안에서 4월 21일 정부부처의 담화문을 근거로 3-5억원의 현금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믿게 하였다. 이어 위도에서는 유치위원회가 구성되고 부안에서는 양성자가속기 유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4개 후보지 외의 지역에서 신청하도록 유도 (2003년 5월 27일 공고)
이러한 양성자가속기와의 연계에도 불구하고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고 고창, 영광, 영덕 등지에서 반핵운동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5월 6일 반핵국민행동은 “정부가 기초과학 연구용 및 첨단산업용으로 홍보하고 있는 ‘양성자가속기사업’이 규모를 확대할 경우 핵폐기물 재처리에 필수적인 핵변환설비로 운용이 가능한 원전 유관시설”이라며 “정부가 사실상 국민들을 속이고 있는 셈”이라고 주장했으며, 고창 주민 200여명은 전북지역 21개 대학 총·학장단 회의가 있는 전북대학교에 들어가 전북에 핵폐기장을 유치하려는 학계의 음모를 들추어냈다. 또한 5월 7일에는 ‘핵폐기장 반대 영덕 군민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무렵, 노무현 대통령과 전북의 정치권은 이미 부안에 핵폐기장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각본대로 밀고 나갔음을, 놀랍게도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자인하였다.
“그때는 어떻든 조금 경쟁적인 것으로 봤다. 오히려 부안이 참 좋겠고 또 선물이 많이 붙어있으니까 이것은 좀 전라북도로 가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라는 판단도 좀 있고 해서 서둘러서 규정을 고쳐서 절차를 단축했다. 문을 좀더 열어놓고 신청을 더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서둘러서 단축해서 했다.”
이는 2003년 10월 26일 전북지역 언론인들과의 대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이다. 위에서 말하는 ‘선물’이란 양성자가속기사업과의 연계추진이다. 이 사업은 당시 지역발전을 앞당기는 첨단산업으로 인식되어 전북 익산시 등 5개 지역에서 치열한 유치전을 벌이고 있었다. 위 대통령 말을 보면 이 사업을 부안에 주기 위해 서둘러 규정도 고치고 절차를 단축했다고 생색을 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5월 27일 변경공고이다. 이 공고의 주 내용은 건설업체로 하여금 핵폐기장 유치활동을 벌이게 하고 그 반대급부로 공사에 대한 계약체결권(수의계약)을 준다는 것이며, 유치활동은 2월 4일에 선정 발표한 울진, 영덕, 영광, 고창의 4개 후보지 이외의 지역에서 벌이라는 것이다. 4개 지역에서 반대운동이 워낙 거센 데다 자치단체장도 신청할 기미가 안 보이자 4개 후보지 이외의 지역에서 신청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뻔히 드러난다.
실제로 건설회사 직원이 부안 주산면에서 마을주민의 도장을 무단 사용, 핵폐기장 유치신청서 조작에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또한 반대급부로 수의계약권을 주겠다니 이는 이들 건설업체들이 유치활동을 하는 데 돈을 충분히 쓸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셈이다.
2003년 10월 10일에 있었던 산자위 국정감사에서 컨소시움을 구성한 건설회사는 현대, 대우, 삼성, 대림산업, 두산중공업 등 5개사로 밝혀졌다. 강인섭 의원(한나라당)은 이날 국감에서 현대건설 원자력사업단장인 최대일 현대건설 전무를 증인으로 채택하였는데 그는 병원 입원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강 의원은 이날 국감에서 “5개 건설회사들이 각기 5억원씩 25억원을 걷어 협약서 초안까지 만들고 이 사업을 뒤에서 도와주려 했다”며, 나름대로 취재한 결과 “D산업이 골프장 건설을 하기 위해 40만평을 위도 반대편에 있는 격포 부근에 사두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유치활동을 하는 위원들이 활동비조로 월 185만원을 받는다는 것과 유치서명을 받아오면 1명당 5,000원씩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돈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에 대한 로비자금도 모두 건설회사에서 나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풀지 못한 채 국정감사는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핵관련 먹이사슬 구조에서 핵폐기장 음모의 핵심을 포착하고도 정치권이 이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신청 이전에 지질조사 완료 (6월 27일 변경공고)
5월 27일자 변경공고가 나간 후 한달 만에 과학기술부와 산업자원부는 6월 27일자〈대한매일〉에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 확보사업과 양성자기반 공학기술 개발사업 연계추진 변경공고’를 또다시 냈다.
여기서 달라진 주 내용은 부지 심사기준에서 “4개 후보지역(울진, 영덕, 고창, 영광)의 지자체 또는 상기 4개 지역 이외의 지자체 중 2003년 7월 15일까지 부지조사를 완료하고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로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지자체가 유치신청한 경우 우선 선정한다”는 조항이다. 이는 4개 후보지역에서 신청한 경우 우선순위를 두던 것을 바꾼 것이다. 예를 들어 영광과 부안이 동시에 신청했을 경우 영광을 선정할 수밖에 없는 규정을 부안을 선정할 수 있도록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4개 후보지역 이외에서 재벌기업들이 유치활동을 벌여 선정되면 계약체결권을 준다는 5월 27일자 한수원의 공고를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4개 후보지역에서 신청해버리면 건설회사들이 부안에 들인 노력은 물거품이 돼버리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또한 5월 1일자 공고에서는 7월 15일까지 유치신청을 마감한 후 부지조사를 실시한다고 하였는데, 6월 27일의 변경공고에서는 7월 15일까지 부지조사를 완료하도록 고쳤다. 그 이유는 위도는 이미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부지 부적합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유치신청을 받고 나서 부지조사를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지질조사를 정확히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질조사가 당장 다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지하수법 37조 3항에 보면 굴착행위를 할 때에는 신고를 먼저 하고 교부증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산자부로부터 부지조사 용역을 받은 대우엔지니어링은 부안 군청에 굴착신고를 냈다. 그러나 부안군청이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자 전북도에 행정심판을 신청하는 한편 변경공고가 나간 다음날인 6월 28일부터 법을 어겨가며 굴착작업에 착수하여 7월 1일부터 5일 사이에 양수용으로 4공, 암체 확인용으로 1공을 완료하였다. 그것도 암체 확인용 1공은 부지 밖에서 뚫었다. 7월 5일에야 접수증이 군청으로부터 교부됐다. 이로부터 1주일 후인 7월 11일 산자부는 위도가 핵폐기장 부지로 적합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부안군에 보냈다. 1주일 동안 5개공을 파보고 그후 1주일 동안 검토해서 적합 판정을 내린 것이다. 지질조사에 착수해서 판정을 내리기까지 14일 걸렸다. 이를 근거로 부안 군수는 유치신청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유혈 진압작전
2003년 7월 11일 김종규 부안 군수가 독단적으로 핵폐기장을 부안에 유치하겠다고 선언하고 몰래 부안을 빠져나가 군의회의 의결마저 무시한 채 과천 산자부 청사에 나타나 유치신청을 하자 부안은 반핵물결에 휩싸였다. 연일 집회를 열어 ‘매향군수’를 성토하고 유치신청 “무효”를 외쳤다. 그러나 정부는 진압전문 경찰 5천여명을 보내 알루미늄 방패에 날을 세워 공격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코뼈가 주저앉고 살점이 찢어지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후보지 결정을 이틀 앞둔 7월 22일, 부안읍에서 가장 큰 거리인 수협 앞 사거리에 1만5천여명의 부안 군민들이 모여 집회를 열고 군청 앞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작정이나 한듯 과잉·폭력진압으로 일관하였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부안은 비탄과 분노에 빠져들었다. 성난 군민들은 부안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막고 늦은 밤까지 “군수퇴진, 핵폐기장 철회”를 외쳤으나 경찰은 이들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이튿날 노무현 대통령은 김종규 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핵폐기장 유치철회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잘해달라”고 격려했다. 이날 전화에서 김 군수에게 “얼마나 힘이 드느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치하한 뒤, “용기를 잃지 말고 국책사업에 최선을 다해달라”며 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안 군민 90% 이상이 지지를 했던 민심은 순간 노무현 정권을 떠나버렸다.
촛불집회
군수의 기습적인 유치신청에 허를 찔린 후 연일 경찰과 대치하며 핵폐기장 반대집회를 열어오던 부안 군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안 군민 여러분의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글귀를 넣은 산자부와 한수원의 광고가 각 일간지에 실리고 부안의 지역신문에 실려 가가호호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산자부와 한수원의 광고는 계속됐다. TV 광고도 나왔다.
“위도,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부지로 최종 확정.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 힘을 모을 때입니다. 전북 부안군 주민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토록 부안을 우롱할 수 있단 말인가.” 7월 22일 경찰의 방패에 찍혀 코뼈가 주저앉고 살이 터지고 온몸에 피멍이 든 부상자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는 부안 군민들은 치미는 분노를 도저히 삭일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언론은 냉담하기만 했다. 어차피 “어딘가에 세워야 할 핵폐기장”이라며 지역주의로 몰고갔으며 김종규 군수를 영웅화 하는 보도도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민들은 촛불을 들고 수협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것이다. 7월 26일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핵없는 세상’의 염원을 담은 부안 주민들의 촛불은 태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꺼지지 않았다.
치졸한 당근정책
정부는 채찍과 함께 당근도 제시하였다. 부안군의 지역발전을 위해 2009년까지 부안군에 모두 1천2백50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하였으며 한수원 본사를 부안으로 이전하겠다고 하였다. 전북도는 위도에 내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포함한 관광랜드를 조성하는 계획을 밝히기도 하였고 전북대 총장은 부안에 전북대 분교를 설립하겠다며 거들었다. 또한 산자부 장관은 위도에 대통령 별장을 짓겠다고 하였다.
한수원은 현금보상이 안되는 것으로 굳어지자 돌아선 위도의 민심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여름 휴가철을 맞은 한수원 직원들에게 위도 낚싯배 이용을 적극 독려하자, 직원들은 낚시는 하지 않고 돈만 주고 하루 이용에 30만원 하는 낚싯배를 사용한 증빙서를 받아가기도 하였으며, 한포대 6천원 하는 위도 멸치를 4만원에 전량 수매하기도 하였다. 부안의 일부 마을에는 추석 선물로 법랑세트와 넥타이 선물세트를 돌렸다.
그러나 매일 3-5천여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를 통해 주민들은 진실을 알았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임을 확인하였다. 이들 앞에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당근정책은 ‘미끼’에 불과하였다. 등교거부에 나선 학생들은 치열한 싸움판을 보고 어른스러워졌고 모든 군민이 ‘핵폭력’ 앞에 하나가 되었다. 가가호호 노란색 반핵기가 나부꼈다. 촛불집회는 어느덧 반핵운동을 뛰어넘어 “주민자치의 희망을 실현해줄 마당”으로 떠올라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원천봉쇄
9월 10일 추석을 앞두고 정부는 촛불집회를 막으려고, 수협 앞 상설무대를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철거하였으며 20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현수막을 뜯어냈다. 그러나, 이후 ‘반핵무대팀’은 매일 무대를 조립했다 헐었다를 반복했으며, ‘막칠하세’라는 이름의 미술팀은 부안군 각 마을을 찾아다니며 벽화를 그렸다. 또한 ‘노랑고무신’이라는 이름의 노래패가 탄생하여 군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변산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조 아무개(47)씨는 대다수가 농민인 부안 사람들의 땅에 뿌리박은 삶을 투쟁의 원동력으로 꼽았다.
“작년 5월에 김 군수가 변산면에 골프장을 짓겠다고 나서면서 부안 농민들은 골프장 반대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때도 군수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어요. 핵싸움이 안 벌어졌으면 우리는 골프장 반대투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삼면을 돌아가며 갯벌인 부안 변산반도에서 모든 생리는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박탈하는 핵폐기장을 누가 환영할 것인가. 더구나 지방자치시대에 주민들이 뽑은 군수가 독단적으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대대로 삶의 터전을 지키며 살아온 부안 군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이며, 촛불집회는 대동굿,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또 한 차례의 유혈진압이 있었다. 먼저 주민투표를 실시하자던 정부는 부안군민들이 연내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하자 이를 거부하며 부안읍에 1만여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하였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주민들 수보다 더 많은 경찰병력이 수협앞 광장을 점거하였으며 11월 19일과 20일에는 결국 유혈사태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부안성당 안으로 옮겨져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노령층 인구가 많은 부안군에서 어르신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11월 23일,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부안성당에 들어서시는 한 할머니의 배낭을 엿보았다. 무릎덮개용 보료,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비닐봉지에 넣어만든 깔방석, 목도리, 타다 남은 초, 종이컵, 바람막이용으로 허리를 잘라 만든 페트병, 그리고 짝짝이가 들어있었다.
반핵민주광장이 원천봉쇄 당하자 성당으로 옮겼다. 이후 눈보라 속에서도 촛불집회는 계속되었다.ⓒ부안21
/허정균
(이 글은 <녹색평론> 75호에 실은 글을 재구성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