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폐기장 후보지 위도를 가다

 

▲2003년 8월21일 격포-위도 해상시위ⓒ부안21

8월 31일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부안군수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치신청이 무산됨으로써 부안 핵폐기장 문제는 끝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영덕에서처럼 또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부안 군민들의 반핵싸움은 국가의 거대한 조직적 폭력에 맞선 싸움이었다. 이들 조직에 전북 지역 국회의원, 건설업체, 관변학자들, 관변단체들, 지역언론, 광역자치단체장 등이 함께 했으며 ‘핵종규’로 불리는 부안군수는 이들에게 포섭당한 하수인에 불과했다. 부안에서 물러간 핵귀신은 인접 군산시와 포항시, 경주시, 영덕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하고 있다. 이제 차분하게 부안 반핵싸움을 돌아보고 이들 핵귀신의 행동방식을 하나하나 밝히고자 한다. 이 글들은 반핵싸움기간 동안에 <부안21>, <참소리>, 5회 발행되었던 <부안21 종이신문 준비호> 등에 실은 것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 부분에 해설을 겸해서 새롭게 덧붙였다.(허정균)

 

위도 핵폐기장과 새만금사업 핵폐기장 후보지 위도를 가다 <2003년 7월 20일>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가 1978년 4월부터 본격적인 상업가동에 들어간 이래 1983년 7월에는 고리 2호기, 1985년 9월에는 고리 3호기, 이어 1986년 4월에는 고리4호기가 준공되었다. 이후 1986년부터 정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핵폐기장 후보지의 물색에 나섰는데 1988년 7월 제220차 원자력위원회는 1990년 초까지 부지를 선정하고 저준위핵폐기장은 1995년 12월 말까지, 사용후핵연료인 고준위핵폐기물은 1997년 말까지 세울 것을 의결하였다. 이와 더불어 비공개적으로 영덕군 남정면, 영일군 송나면, 울진군 기성면 등 동해안 3개 지역을 핵폐기장 후보지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해당지역에 알려지면서 1순위인 경북 영덕을 중심으로 최초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1989년 3월의 일이었다. 국도를 점거하는 등 예상치 못한 저항에 밀려 정부는 부지에 대한 세부 조사를 중단하며 슬며시 물러났다. 국내 반핵운동의 최초의 승리였다.

이후 정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며 강원도 고성, 양양, 경북 울진, 영일, 경남 양산, 울주, 전남 강진, 장흥, 완도, 진도, 영광, 전북 고창, 충남 보령, 안면도, 인천 굴업도 등지로 침투했지만 주민들의 반격에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성장-개발이데올로기가 정점에 달한 80년대에 별다른 저항없이 원자력 발전소를 구축하였지만 핵폐기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전국의 해안 마을을 다 쑤셔보았지만 반기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해안 마을 을 파고들며 미끼로 던진 것은 ‘지역개발’이었다. 당시 ‘개발’이란 통치 지배 이념이었다. 지금도 그 이념은 ‘신개발주의’로 옷만 바꿔입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핵’은 통하지 않았다. 개발이란 외투를 벗겨낸 핵심에 핵이 있음을 안 이 땅의 민초들은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왜 위도 주민들은 그 ‘핵을 우리 동네에 놓아주시오 했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도 주민들이 군청에 와서 핵폐기장 유치해달라고 청원을 해도 위도 출신 부안군수는 그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는데 강현욱 전북 도지사를 만나고 난 군수는 군의회에서 부결을 하기 1시간 반 전에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노라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2003년 7월 11일 오전 9시 30분의 일이었다. 그것도 부안군에서가 아닌 전북 도청에서 선언을 하였다.

이후 부안 군민들은 즉각 부안군수 성토에 나섰다. 그날 군청 마당에서 1,000여명이 모여 항의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에 ‘핵동맹’을 맺은 전북대 두재균 총장이 부안을 향해 커다란 미끼를 던졌다. 부안군에 방사선 기술(RT)관련 학과와 연구소 등이 포함된 ‘부안 제2캠퍼스를 설립‘한다는 부안군수와의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14일 김종규 부안군수와 김형인 군의회 의장은 모처에 잠복해 있다가 부안을 몰래 빠져나가 과천 산자부 청사에 잠입해 들어가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및 양성자가속기 기반공학사업 유치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부안 군민 3,000여명이 모여 핵폐기장 반대 2차 궐기대회 개최하였고 부안군 의회에서는 부안 군의회 의장 불신임안 제출하였지만 18일에 고건(高建) 국무총리는 원전수거물관리센터 관련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핵 폐기장 유치 신청자인 전북 부안군과 위도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위해 ‘위도 특별법’을 제정하고 ‘위도 종합개발 기본계획’도 수립한다고 하였다.

이튿날 부안의 의사들, 치과의사들, 한의사들, 약사들이 주도하여 부안 반핵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부안 군청까지 ‘핵폐기장 결사반대’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튿날 이들 의료진 일부와 함께 위도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위도에서 ‘새만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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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당ⓒ부안21

변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번 위도 방문은 두 번째이다. 왜 위도 사람들 거의 모두가 핵폐기장 유치를 찬성했을까. 칠산어장의 모태인 새만금갯벌이 다 죽어가는데 칠산어장의 중심인 위도주변의 어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에 대해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이번 위도 방문의 목적이다.

아침 7시에 카페리호가 격포항을 벗어나자 수성당이 있는 대막골이 시야에 들어왔다. 변산반도의 서쪽 끝자락 하나가 바다를 향해 쑥 들어온 곳이 대막골인데 이곳은 고대 연안항로를 따라 오가던 배들의 중간 기항지였다. 다도해의 뭍섬 사이를 요리조리 헤쳐온 배들이 영광 앞바다의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사산도 오산도 육산도 칠산도의 섬들을 벗어나면 망망한 수평선이 펼쳐진다. 노, 돛, 키를 분주히 움직이던 선원들이 순풍에 배를 맡기고 휴식을 취하던 곳이 바로 영광 앞바다에서 이곳에 이르는 해역이다.

이들의 뱃길을 안내하는 중요한 섬이 쌍둥이섬이다. 위도 대리 마을에는 쌍둥이가 끊이지 않고 태어났는데 쌍둥이를 낳으면 반드시 한 아이는 바다에 버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씨부인은 쌍둥이를 낳고도 한 아이를 버리지 않고 몰래 숨겨두고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 속에 허연 신령님이 나타나 “너의 아이 둘을 다 데려다가 저 동쪽 바다에 섬 두 개를 만들어 뱃길을 인도하는 표적으로 삼을 것이로다” 하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양 옆에서 자던 아이들은 간 곳이 없고 희미하게 먼동이 터오는 동쪽에 섬 두개가 형제처럼 서 있었다.

이 쌍둥이섬의 안내를 받은 배가 뭍으로 올라 긴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고 무사항해를 빌던 곳이 대막골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수성당’이라 불리는 당집이 있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 이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이곳이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제사유물들이 출토된 것이다. 전주박물관측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출토된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은 절벽 위의 평탄면, 즉 수성당 뒷편의 8× 9m2 범위에 20∼30cm의 두께로 쌓여 있었다.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삼국시대의 일부 유물에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교란상태로 출토되었다. 먼저 삼국시대 유물로는 각종 항아리, 그릇받침, 독 등의 토기류와 쇠창, 쇠살촉, 안장틀, 말띠두르개, 청동방울, 청동거울 등의 금속유물, 도끼, 거울, 손칼, 갑옷등의 실물을 모조한 석제, 토제모조품이 있다. 그 외에도 구슬류, 중국제 도자기가 소량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금속유물은 큰 독의 내부에 넣어져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고, 석제 모조품은 좁은 범위에 쌓여 있었다. 그 외의 유물들은 개체별로 좁은 범위 내에서 모여진 상태로 출토되었으나 토제 말, 중국제 청자, 구슬등은 정형성이 없이 흩어져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토기, 기와, 백자가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는데, 이미 교란된 것이었다. 토기들은 주로 단지, 접시, 병이고, 자기류는 접시, 잔, 합, 병과 말모양 자기등이며, 기와류는 막새는 하나도 없이 모두 평기와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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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도ⓒ부안21

당집 바로 옆은 원통 모양으로 파낸 듯한 두 벼랑이 맞보고 있다. 밀물이 파도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 안으로 휘들이칠 때 수십 길 되는 벼랑 위에서 이를 내려다 보면 한여름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곳이다. 이곳을 여울굴이라 한다.

이 여울굴 안에서 개양할미가 나왔는데, 딸 여덟을 낳아 일곱은 각 도에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았다. 개양할미는 키가 워낙 커서 서해바다를 걸어다녀도 버선목까지 밖에 물이 차지 않았다 한다. 다만 곰소(熊淵) 둠벙이 하도 깊어 치맛자락을 조금 적셨다 한다. 그래서 개양할미는 치맛자락에 바위를 담아 날라다 곰소를 메웠다고 한다. 이 개양할미는 서해바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수심을 재고 길을 잃은 고깃배들을 인도하여 이곳 어민들로부터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도 대막골에서는 정월 보름이면 개양할미를 모시는 동제를 지내고 있다.

여울굴에는 개양할미의 전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대막골에 어느 형제가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형은 날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오고, 동생은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면서 지성으로 어머니를 돌보며 의좋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로 나간 형이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바닷가에 나가 밤새도록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동생은 형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생마저 소식이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앞 못보는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두 아들을 향해 더듬거리며 바닷가쪽으로 나간 곳이 여울굴의 벼랑 위였다. 이곳에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두 아들의 이름을 외쳤으나 여울굴을 휘돌아오는 메아리 뿐이었다. 메아리 소리를 아들이 대답하는 소리로 착각한 어머니는 바닷가쪽으로 걸음을 한발짝씩 떼어놓다가 여울굴 깊은 물에 빠져 영영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달이 지난 날씨가 좋은 어느 날, 순풍에 흰 돛을 단 배 한 척이 이곳에 닿았는데 그 배에는 건장한 두 청년이 얼굴이 고운 두 색시와 함께 타고 있었다. 배에서 두 청년이 내리는데 몇 달 전에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던 두 형제가 아닌가.
두 형제가 배에서 내려 여울굴 벼랑 위에 서자 물이 차 오르는 여울굴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이 나와 두 청년 앞에 나타났다. 형제는 노인에게 큰 절을 올렸다. 노인은 먼 외딴 섬에서 그동안 두 형제를 가르친 스승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 너희에게 황금 부채 한 개씩을 줄터이니 한 개를 가지고는 나라를 구하고 또 한 개로는 마을을 평안히 하도록 하여라. 너희 모친은 편안한 곳에 잘 모셨으니 염려말고 선행을 베풀도록 하여라” 라고 말을 마치자 노인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절을 올리고 난 뒤 형은 황금부채를 부쳐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성난 파도가 일었다. 이번에는 동생이 가진 부채로 부치자 풍랑이 금새 잠잠해졌다.

두 형제는 그 곳에 수성당을 짓고 노인의 은덕을 기렸다. 그러자 여울굴 안에서 철마 한 마리가 나왔다. 이 철마는 평상시에는 작았으나 형제가 타기만 하면 큰 말이 되어 외적이 나타나면 형이 타고 비호처럼 달려가 황금 부채로 풍랑을 일으켜 적의 배를 모조리 부셔버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고기잡이 하러 나간 뒤 풍랑이 일면 동생이 타고 나가 황금 부채를 부쳐 풍랑을 잠재워 많은 사람을 구했다.

형제가 죽은 후 이 철마는 여울굴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어머니와 아들 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정월이면 뱃길의 무사함과 풍어를 비는 동제를 오늘까지 지내오고 있다.

이 전설은 해적과 풍랑에 시달리던 이 지방 어민들의 염원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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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부사에 부임했던 허균(許筠)은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당했다.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 임금이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 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이 때 <홍길동전>을 지었다 하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율도국은 바로 위도를 보고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변산의 어느 봉우리에 올라도 위도가 보인다. 그러나 오늘은 짙은 해무로 바다와 하늘의 구분도 없다. 격포와 위도 사이의 뱃길은 15km이다. 그러나 중간 곳곳에 암초가 솟아있어 인근의 어선들도 접근하기를 꺼리는 해역이다. 격포항을 벗어난지 30여분 지나자 임수도가 나타났다.

연세대학교 국악 연구실은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꽃다운 나이 16세에 만경 창파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금부터 3백여년 전 전남 곡성군 옥과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이며, 인당수는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역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연세대학교 국악 연구실 책임 연구원 양권승씨에 따르면 <고려사>와 <고려도경> 등 여러 문헌을 볼 때 이곳은 한반도와 중국 절강성과 복건성을 오가던 조공선과 교역선이 주로 이용했던 해로상의 요충지로 심청전의 원형인 <관음사 사적기>의 분석 결과 공양미 3백석에 남경상인에 팔려 옥과를 떠난 심청은 섬진강을 따라 승주 낙안포에 이른 후 남해의 금일도에서 대형상선으로 갈아탄 다음 부안의 소래포(현 내소사앞 포구)를 거쳐 위도 부근의 임수도 해역에 몸을 던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임수도는 변산도 격포와 위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무인도로 원래는 인수도라고 불렀으며 촌로들의 구전에 의하면 육지에서 떠난 배가 남중국으로 향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한 이곳은 워낙 물살이 거센데다 안개가 자주 덮혀 있어 해난사고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93년 10월 10일 바로 이 곳에서 서해훼리호가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격포항으로 가던 중 거친 풍랑에 휘말려 291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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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훼리호침몰 위령탑ⓒ부안21

임수도 해역을 지나 15분쯤 더 항해하여 위도 북쪽 끝에 있는 파장금항에 닿았다.

위도는 본도 외에 식도(食島), 거륜도(車輪島), 정금도(井金島), 상왕등도(上旺登島), 하왕등도(下旺登島) 등의 유인도와 임수도(臨水島)와 형제도(兄弟島) 등의 크고 작은 무인도를 합쳐 30여개의 섬으로 되어 있으며 본도의 면적은 11.14 Km2이고 600여 가구에 2,5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위도(蝟島)는 온통 산으로 된 섬에 소나무가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삐죽삐죽 솟아나 있어 붙은 이름이라 한다.

고려조 이래 위도는 부안군에 속하였었으나 1896년에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나눌 당시 고군산군도와 함께 전남 지도(智島)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고군산군도는 옥구군으로, 위도는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시행한 행정구역 개편에서 전라북도의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편입되고 위도는 다시 부안군으로 편입되었다.

파장금항 맞은편으로 식도(食島)가 보인다. 식도와 위도, 정금도로 둘러싸인 이곳은 조기가 많이 잡히는 3월에서 6월까지 파시가 들어서면 칠팔백 척의 고깃배가 빽빽히 들어서 닻을 내려 밤이 되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던 곳이었다.

해마다 4월 중순에서 5월 상순이면 이곳의 수온은 11~14도로 조기산란의 최적온도여서 산란을 위해 3, 4월에 흑산도를 거쳐 조기떼가 이곳으로 회유해 들어왔다. 변산반도 주위의 갯벌은 이들에게 풍부한 먹이와 산란장을 제공해 주었다. 이 때가 되면 남해안에서는 물론 동해안에서도 배가 와서 조업을 했으며 왜정 때에는 일본배가 오기도 하였다. 치도리에는 일본인 어부를 위한 유곽까지 들어서기도 했다 한다.

여기서 잡는 조기의 양은 배 한 척당 평균 50~60동이었다. 1동은 1000마리이니 이곳에서만 대략 4천만 마리의 조기가 잡혔던 셈이다. 이 때 파장금과 치도에 조기를 매매하는 시장이 들어섰는데 이것이 바로 파시(派市)이다.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의 하나이다. 파시가 들어서면 석유, 장작, 발동기, 각종 어구, 식량, 부식물, 각종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들어오고 요리집, 다방, 여관, 선술집, 이발관, 미용실, 도박장, 떡집 등이 빈터만 있으면 들어서 파장금 마을은 수만명이 북적거리는 중도시로 변했다.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대부분 영광군 법성포나 줄포를 통해 굴비로 가공되어 내륙으로 들어갔는데 영광굴비의 명성은 여기서 나왔다. 영광의 칠산도에서 위도를 거쳐 고군산군도에 이르는 해역을 칠산바다라 하는데 이처럼 위도는 칠산어장의 중심이었다.

이같은 서해 황금어장을 침탈하는 외적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조 숙종 8년(1682년)에는 위도진(蝟島鎭)을 설치하고 첨사(종3품 무관)를 두었다. 이듬해에 가리포 차임류 고군산 우포 다경포 법성포 검모포 군산포 지도 팔보를 위도에 속하게 하였는데 이는 전라 우수영의 관할구역이 너무 넓어 진관 하나를 위도에 두어 인근의 진포를 관할케 한 것이다. 첨사가 53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근무하던 관아 건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곳 칠산어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어민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앞의 전설에서 보듯 거센 풍랑과 외적의 침략이었다. 위도진은 이러한 외적의 침탈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 들어 고기들의 산란장이자 성장기를 보내는 갯벌을 없애는 대규모의 간척공사를 시작하면서 위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해 황금어장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파장금항 뒤편으로 옛날의 영화를 간직한 술집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스러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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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치도, 썰물때는 바닷길이 열린다.ⓒ부안21

서해훼리호 침몰로 많은 위도 사람들이 화를 당하자 정부에서는 위도 주민들을 위무하는 차원에서였는지 예산을 배정하여 일주 포장도로를 내주었다. 이 도로를 따라 치도리로 넘어가는 도로의 절반은 그물을 널어 말리고 있다. 그물을 길게 늘어놓고 수선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이처럼 끝도 없이 그물을 늘어놓고 말리는 모습은 처음 본다. 위도에서 제일 높은 망월봉(255m)을 돌아 섬의 동쪽 해안으로 나섰다. 섬의 북쪽에 자리잡은 망월봉에서 해안까지의 거리는 500여미터나 될까. 45도 각도쯤 돼 보이는 급경사이다. 그런데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만든 홍보 책자에는 이곳에 골프장이 들어설 것이라며 계획이 잡혀있다. 경사가 급한 저 산을 다 밀어내고 골프장을 만들 것인가.

치도리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앞으로 섬 둘이 나란히 있는데 큰딴치도와 작은딴치도이다. 꿩의 형상이어서 치도(雉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 치도리에서 태어나 군산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살다가 다시 고향에 내려와 사는 서대석씨(52)를 만났다. 그는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위도 사람들의 사는 형편과 일대 해역의 어장 상황을 물어보았다.

“영광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부터 어장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위도 아래로 영광 앞바다까지는 영광사람이나 고창사람들 위도 사람들 다 함께 어로작업을 하는 어장이거든요. 그런데 영광이나 고창에서는 많은 보상을 받았지만 위도 사람들은 한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거주지로 봐서는 벗어나 있지만 생활 터전은 영광이나 고창에서와 똑같이 타격을 받았지요. 그런데 거주지가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하여 보상을 못해준다는 이 법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위도는 거의 산으로 돼있어 밭 한 뙈기 일구기도 힘든 곳입니다”

▲예전에는 모래펄이어서 갯벌에서축구를 할 정였는데, 새만금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죽벌이 쌓이고 있다.ⓒ부안21

현행 보상법은 ‘문제가 되는 곳을 기점으로 몇 킬로까지’ 이런 식이다. 위도는 이 거리에서 벗어난다 하여 보상금을 한 푼도 못 받은 것이다. 또 위도 근해 어장에 온배수가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데 있어서도 밀물 때와 썰물 때의 조류 방향이 서로 반대인데 일부러 조류가 영광 쪽으로 흘러가는 썰물 때 조사를 하여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도록 했다고 위도 사람들은 믿고 있어 정부에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위도 어민들은 어떻게든 보상을 받아보려고 ‘보상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에게 변호사가 있었겠는가. 환경단체에서도 이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알아가지고 찾아가면 그 사람들이 딱 담을 쳐버리는 거예요. 코 앞에서도 보상을 못 받고 있는데 위도에서 보상을 받으러 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면서 상대도 안해주는 거예요. 지네 떡 줄어들까봐 우리를 배제시켰다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육지 사람들에게 분하고 서운한 마음이 있고…. 그래서 한번 당했으면 그걸로 끝났는데 새만금에서 또 당한 거예요.”

새만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만금에서도 이들은 한 푼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새만금 보상금은 2차 보상 때 방조제 밖 20km까지 사는 거주지 중심으로 보상을 해주었었다. 이 때의 보상추진위원회가 오늘 핵폐기장 유치위원회의 모태라는 것이었다.

▲위도 핵폐기장의 시작점에는 새만금이 있다. 위도 일주로는 그물 말리는 작업장으로 변해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시위다. 새만금사업이 시작되자 유속의 변화로 인해 그물을 쳐 두면 그물이 막힐 정도로 때꼽째기가 잔뜩 끼어나올 뿐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부안21

새만금사업으로 인한 위도 어민들의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저 앞 치도로 들어가는 뻘이 옛날에는 축구를 하고 놀 정도로 딴딴했어요. 그런데 새만금 막으면서 점점 여기 말로 죽뻘이 쌓여 지금은 푹푹 빠집니다.”

유속이 둔화되면서 위도 일대의 해역에 뻘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수 년 전 스쿠버 다이버들이 왕등도에서 물 속을 조사했을 때 상상 외로 혼탁했다는 말은 들었었다.

“지금 위도 돌아다니면 도로에 막 그물을 널어놓았는데 이게 일종의 시위를 겸하고 있습니다. 차가 다닐 때 위험하고 냄새도 나고 해서 면이나 파출소에서 여간 신경을 쓰는 게 아닌데 시위적으로 널고 있어요. 이게 새만금하고 연관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방조제를 막아서 물의 유속이 죽다보니까 뻘이 차오릅니다. 어느 정도냐면 어초를 심은 것이 다 묻혀버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쳐 두면 때꼽째기라고 하는데 그물에 때꼽째기가 잔뜩 끼어나오고 그물이 막히는 겁니다. 그러면 고기가 안잡힙니다. 그래서 이걸 말려가지고 일일이 전부 도리깨질을 해서 텁니다.”

▲서대석 씨ⓒ부안21

이러다 보니 그물을 말려 터는 동안 1, 2천만원의 돈을 들여 그물 한 벌을 더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도 아니다. 산란장이자 성장기를 보내는 갯벌이 사라지면서 어족자원이 점점 크게 줄어들고 있다. 재작년 여름 변산면 모항에서 들은 얘기이다. “쭈꾸미 철 한 철에 아무리 못 벌어도 한 사람이 2천만원은 벌었는데 올해는 잘한 사람이 천만원 벌었다”는 것이었다. 작년에는 500만원 정도 벌었다고 들었다. 이처럼 어족자원이 줄다 보니 점점 더 먼 바다로 나가야 되고 배가 더 커져야 했다. 따라서 기름값도 더 많이 들었다. 어민들은 점점 눈덩이 불어나듯 늘었다. 이곳에서 배를 부리는 어민들이 진 빚은 농사짓다가 진 빚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다. 1, 2억 정도는 기본이라고 한다.

“소득은 줄면서 재투자는 더 늘어나니까 결국 빚이 늘어나게 되었어요. 위도에서 어장을 하는 배들이 10여년 사이에 3배로 커졌고 빚도 3배로 늘었어요. 상황이 이러한데 이번에는 고창에 핵폐기장을 짓겠다는 거라. 이것이 위도 사람들을 자극했어요.”

부안이 핵폐기장 후보로 떠오르기 직전에 위도와는 같은 어업권인 영광과 고창이 핵폐기장 후보지로 결정나는 듯 했다. 영광은 원불교의 발상지이라 교단 차원의 저항이 거셌고, 고창 주민들은 5월 6일 전북지역 21개 대학 총, 학장단 회의가 있는 전북대학교에 들어가 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리 작성해놓은 ‘전북지역에 핵폐기장을 유치한다는 합의문’을 적발하며 강력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군사 용어로 ‘양동작전’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6

서씨가 말하는 위도 거의 전주민들의 핵폐기장 유치찬성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지난 봄부터 국무총리실 산하 산업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는 박교수라는 사람이 위도로 낚시를 몇 차례 왔다.

“낚시를 몇 차례 와서 주민들에게 이렇게 접근을 한 거 같아요. 위도를 와서 보니까 참 좋은 거 같은데 너무 낙후돼 있는 거 같다.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국책사업이 하나 있는데 이거를 하면 정부가 3,000억원을 투입을 해서 획기적인 지역발전을 이룰 수 있다. 위도의 발전을 100년은 앞당길 수 있다.”

“그게 위험하지 않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니까 절대 위험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확인시켜 줄 수 있으니 언제든지 대덕에 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주민들 80여명이 5월 9일에 관광차를 대절해서 대덕으로 가게 됐다. 서씨도 이틀 전에 이를 알고 한번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씨는 핵폐기물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서씨는 서울의 자녀들과의 통신을 위한 수단으로 아이들이 쓰던 컴퓨터를 가져와 메신저, 이메일 등을 이용해 오던 터였다.

“아빠 그거 하면 큰일나는 거예요, 그거 하면 안돼요. 하면서 아들이 반핵단체 사이트를 쳐가지고 이거 프린트 해서 보라고 알려주더라구요.”

서씨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작년 9월 전남의 어느 유치 반대단체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보았다. 그 성명서에서도 주요 쟁점이 3천억 지원문제임을 알았다. ‘3천억을 그냥 줄 것처럼 선전을 하는데 사실 3천억의 내용은 이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 성명서의 주된 내용이었다. 서씨는 이것이 핵심일 것 같아 이를 메모해 두었다.

“정말 이게 핵심이었어요. 관광버스 타자마자 박동배라는 사람이 그 얘기를 하는 거라. 3천억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기가 막히는 거예요. 제가 알고 있는 거와는 영 다른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얘기가 다 끝난 다음 제가 질문을 했어요. 나도 어제 인터넷에 들어가서 알아봤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것이 발전소지원특별법인데 당신 얘기하는 것이 그 법 맞냐고 물으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해석이 다를 수가 있느냐 하면서 조목조목 짚어가며 따지니까, 아 사장님 그건 옛날 얘기라는 거예요. 그건 옛날 얘기이고 금년 4월 21일에 10개부처 장관이 모여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직접 보상도 받을 수 있고 지자체장 맘대로 돈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간 기자회견을 했는데 자기가 말한 내용은 그 기자회견 내용을 얘기한 거라고 해요. 그러면 그 기자회견 성명문을 볼 수 있냐고 하니까 대전 가면 보여주겠다고 해요. 더 이상 제가 할 말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대전에 가서 그것 좀 보자 하고 끝났는데, 이제 주민들이 질문을 하는 거예요, 궁금하니까. “우리 맘대로 쓸 수 있다는데 그러면 우리가 노나가져도 되냐”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박동배가 “아 그래도 된다”는 거예요, 맘대로 쓰라고 한거니까. 그러니까 주민들이 “위도가 600세대니까 한 오억씩은 되네” 해서 오억 얘기가 나왔는데 부안자치단체로 나온 돈인데 어떻게 위도만 다 가질 수 있냐, “한 이억씩 떼어서 줘도 3억은 되네” 이러면서 3억에서 5억 받는다는 얘기가 나온 겁니다. 그러면서 또 하는 얘기가 이거 말고 또 있다는 거예요. 10개부처 장관이 모여서 성명을 낼 때 그 지역의 숙원사업 하나는 꼭 들어주겠다고 했다는 거라. 그러면서 위도의 숙원사업이 뭐냐고 하니까, “그러면 저 격포까지 다리 놓아달라고 하면 되겠네” 누가 이러는 거라. 그러니까 “아 그것도 가능하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입소문이 퍼지게 됐어요. 80명이 다녀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다 얘기했을 거 아닙니까. 그 때만 해도 박동배라는 사람이 한수원 직원인줄 알았어요 다들. 한수원이니까 정부로 생각한 거죠. 한수원의 박사가 그러는데 3억에서 5억을 주고 격포까지 다리를 놓아준다더라. 위도 주민 전체가 그렇게 알아버리고 서명하라니까 3일만에 96%가 서명에 참여해서 거의 다 찬성을 했어요. 갔다온 다음 다음날 주민 총회를 했는데 그 주민총회에서부터 서명을 받은 거예요.”

그는 3억원설의 진원지를 상기하면서 후일 부안군청 사이트에 다음 글을 올렸다.

2003-06-15 오전 9:47:05 조회수 173
박동배 님 에게 묻습니다….

먼저 저는 지난5월9일 위도주민들과 같이 대전에있는 원자력환경기술원에 같던사람 입니다…..
님도 5월9일10일 주민들과 동행하셨지요,,….
아마도 글을 읽다보면 누군지 기억나실겁니다….. 질문도 많이했으니까요….그때그질문의 답변을 다시한번 공개적으로 듣고싶어서 이 글을올입니다…..먼저 3000억원 지원금 문제입이다…..
지원금 삼천억원은 주민들 마음대로 쓸수있다고 하셨죠,,,,그래서 제가알고 있기로는 지원금은 핵발전소 주변지원법에 의해지원대는 것이니 그렇치 안을거라고 하니 그것은 옛말이고 2003년4월21일 10개부처 장관님들이 특별성명을 발표 3000억지원금은 지역주민들 마음대로 할수있으니 막말로 나누어 가저도된다고 하여 주민들이 3000억 나누기 600세대(위도가600세대쯤 된답니다) 그래서 5억씩 그런데 부안군 다른대도 있으니 2억씩양보해서 적어도 3억씩……./
그때부터 위도주민들은 핵패기장을 위도에 유치하면 적어도 3억원씩은 준다더라…… 이게 3억원의 원조 입니다…..기억 나십니까,?????
그리고 한가지만더 특별성명 안에는 핵패기장 유치지역의 주민숙원사업 한가지는 꼭 들어준다고 하여 주민들이 그럼위도에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니 그것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가능 합니까.??????
확인 할게너무 많습니다……
우선 이 두가지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님을 잘몰라서 다른분에게 물어보니 박사님이시고.. 교수님 이시라고요…… 저는 위도 섬놈 입니다….. 양심이 있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박동배라는 사람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http://www.stepi.re.kr) 동북아협력팀에서 부연구위원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고향이 전북 진안이며 지금은 동진면 하장리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수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테면 브로커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섬사람들을 마치 한수원 직원인 것으로 믿게 했고 대덕에까지 안내를 했다. 대덕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6, 70대 노인층으로 52세인 서씨가 가장 막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의문나는 점은 주로 서씨가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선진국에서 핵폐기장 만들어 놓은 것을 절대 안전하다고 강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안전에 대한 의식이 우리보다 강하지 않느냐.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얼마나 안전사고가 많이 났느냐. 안전에 대한 불감증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관리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랬더니 아 그 질문 참 좋은 질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박사라는 사람이 하는 얘기가 핵폐기물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IAEA 사찰을 받는답니다. 그래서 국제 규격에 의해 IAEA 감시하에 핵폐기장을 만들기 때문에 절대 안전하다는 거야. 얘기를 듣고 보니 이게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정말 그걸 거 같기도 하고 특히 유리고형화 공법이다 해서 그 유리 안에 가둬서 저장하고 하면 정말 안전할 거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서씨는 맘이 동요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돌아가면 반대입장에 있는 학자들이나 반핵단체를 초청해서 반대 의견도 들어볼 계획을 세우고 이 문제에 대해 상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자 한수원 측에서 그를 배제하기 시작했고 서씨는 그들이 서두는 모습을 보고 의심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온 다음 다음날 주민총회를 하는데 서명을 받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대의견도 들어보고 해야지 벌써 서명을 받으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지금 시간이 없으니 서명부터 받고 하자”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서명을 받고 돈 준다는 소문은 다 났고 주민총회 안나온 사람들은 집에 찾아가 서명을 받아내고 그랬어요”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자 서씨는 처음으로 인터넷에 글을 썼다. 부안군청 사이트 게시판에 뚜벅뚜벅 서툰 타자 솜씨로 글을 썼다고 한다. 다음은 서씨가 5월 15일 새벽에 올린 글이다. 지금도 부안군청 사이트 게시판에 가면 볼 수 있다.

2003-05-15 오전 1:37:38 조회수 138
위도 좀 도와주세요

저는 위도 .치도리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위도에서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아시다시피 위도에 여러 사람들이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만들겠다고, 아니 유치하겠다고 발벗고 나섰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5월 9일) 위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오는데 최적지이고 전혀 위험하지도 않고 보상금도 많이주고 전혀 위험하지 안다는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 견학을 간다고 하여 알고나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하자는 생각으로 대전에 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데는 원자력 환경 기술원 , 1박2일, 견학도 하고 유명하시다는 박사님들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과연 그분들의 뜻대로 순진하기만한 위도 주민들은 동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위험한건 전혀없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몰라서 반대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위도 주민들은 기회를 잡은겁니다. 위험하지도 않고 돈도많이주고..더구나, 지원금 3,000억원을 주민들 마음데로 (그러니까 나누면 3억씩, ) 하여도 된다니 큰일났습니다. 남이 하기 전에 빨리 빨리 서둘러서 유치 하여야지요. 아니 핵패기장 유치 환영 대회라도 열어야 할 판입니다. 아니 왜 이렇게 서두루는 것 입니까, 아는 것은 없고 분위기는 이상하게만 흘러가고 다급한 마음에 컴맹 수준의 제가 인터넷을 뒤지기로 했습니다. “한국 반핵 연대” 반가웠습니다. (원래 싸우는 사람들은 양쪽 말을 들어 보아야지. 한쪽 말만 들으면 누가 나쁜건지 모르잖아요,) 2003년 1월29일 오전 10시에 참여연대 강당에서 핵패기장 반대 100인선언 기자회견이 있었다는데 100인 중에는 알만한 유명한 분들이 많이 있데요,거기서 회견내용에 눈에 확 들어오는게 산자부 는 “자율유치” 를 추진한다면서 사실은 특정지역을 정해놓고 한국 수력 원자력 주식회사 직원을 파견하여 유치위원회를 구성케하고 유치위원에게 급여를 제공하고 활동비를 지원 찬성서명을 받도록하여 “자율 유치” 를 주장한다는데, 영광 에서는 유치서명 1인당 3,000원씩의 비용을 지급하였다는것이 mbc 카메라 출동에서 확인되었다는데 (위도도 그런가 ?????? ) 우리와 비슷한 섬들이 진도. 완도. 안면도. 굴업도, 다들 싫다는데 절대로 안된다는데. 왜 위도는 환영 분위기인지. 하지만, 위도 사람들 전부가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찬성하는 사람들 눈치를 보아가며 (위도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몇 사람 유지라 할수있는 분들을 만나 보았거든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핵패기장이 들어오면 뭐가 어떻게 얼마나 위험하다는것을 자세히 모르니 목소리가 너무 적어요. 그분들은 점잖은 분들이라 확실히 모르는것을 아는 척 떠들지를 않거든요, 아무튼 우리는 너무 많은 한쪽편의 말만 들었습니다. 반대쪽의 의견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도와 주세요.

그러자 몇 분이 위도에 왔어요. 그래서 제가 들은 것을 얘기하고 의문나는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핵폐기물 IAEA 사찰 받는 것도 고준위만 받는 거지 중저준위는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전혀 사찰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네들 빠져나갈 구멍은 기가 막히게 만들어 놓아요. 제가 하도 기분이 나빠 그 사람들 나중에 만나서 따졌더니 “내가 언제 고준위니 저준위니 그런 말 했느냐. 고준위도 핵폐기물이지 않느냐” 그러는 거예요.”

이후 서씨는 이게 아니다라는 확신을 얻고 주민들 설득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3억원 받는다는 설은 신앙처럼 주민들 마음 속에 자리잡아 그의 말은 통하지가 않게 되었다. “박사가 그렇게 안전하다고 얘기했는데 너는 박사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정부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느냐”는 식이었다. 그는 반대쪽 의견도 들어보자고 하였지만 한수원은 일방적인 설명회만 하고 이를 공청회라고 하였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위도 주민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하려고 하였지만 학부모들의 압력을 받은 교장선생님은 학교를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운동장이라도 빌려 달라고 하여 겨우 허락을 얻었는데 고작 7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6월 11일 위도 주민총회 후 서씨에 부안군청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2003-06-15 오전 3:35:29 조회수 121
핵패기장 유치위원회가 주관하는 위도주민총회에서 생긴 일.—–

위도 주민들은 왜 핵패기장을 위도에 유치하는대있어 찬성하는쪽 이야기만 들어야합니까?…
산업자원부나 한수원(한국수력 원자력주식회사)쪽이야 어떻게 하든 패기장을 설치해야하는 쪽이니 자기들에게 유리한 이야기만할것이고 불리한
이야기는 안할것 아입니까.?….
3억원씩을 준다고요,, 찐짜로 줄까요…
위도주민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참고로 위도주민 대다수가 70세가 넘은 고령자들 입니다….)
전혀 위험하지 안타고요,?….. 핵패기장을 유치하면 위도가 100년을 앞당긴다고요.?…. 그렇게 좋은걸 왜 서울에 안합니까.?…
좋은건 서울에다 있던데….
핵패기장 위도유치위원회는 ….한수원이나 산자부’쪽 설명회만 열심히 개최하고 반대하는’환경단체 나 반핵단체의 설명회는 인위적으로 막고있습니다……
본인생각은 찬성 과 반대를 하기전에 왜 핵패기장은 유치해야 하는건지 왜 또 유치하여서는 안되는건지 양쪽의 논리를 공평하게 들어보고 판단을 내려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6월 11일 핵패기장유치위원회가 주관
하는 위도주민총회 에서 …..
찬성하는쪽 과 반대하는쪽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공청회를 위도주민들을 상대로 열자고 하였습니다…..
이런의견을 발표하는중에 그런걸왜 하느냐는 야유와 함께 어이없게도
마이크까지. 빼앗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앗습니다…….
반대한다는 것도 안이고 공정하게 공청회 한번하자는데,,,,,,
핵패기장 위도유치위원회 위원님들 도대체 핵패기장에 대해서 얼마나알고 찬성하십니까.?????
나는 잘몰라서 찬성도 반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청회 한번들어보고 결정 할려고 그러는데 잘못되었습니까.????
무조건 찬성해야 합니까.??? 나는 찬성을하든 반대를 하든 위도를 위해서 할것입니다..,,
유치위원님들도 그럴거라 믿습니다만 이거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에 핵패기장을 유치하고도 개인보상금이 안나온다면 그동안
생전처음 만저볼 억 억 억 때문에 잠이안온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떻게 될까요.”???? 정말 정말 저는 걱정이 됨니다……..

위도 주민들은 군청으로 세 차례나 몰려가 군수 면담을 요청하였다. 김종규 군수는 위도면 대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러나 군수는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처음에는 핵폐기장을 부안에 유치할 생각이 없었다고 서씨는 말했다.

이쯤 되면 노인들 상대로 하는 네바다이 수준이다. 한수원이 핵브로커 박동배를 고용하여 벌이는 핵네다바이인 것이다. 그러면서 한수원은 교묘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마련해 놓고 있다. 그들이 발간한 홍보 책자에는 나중에 발목잡힐 사안이 하나도 없다. 모두가 박동배 말을 잘못 들은 위도 사람들 잘못일 뿐이다.

한수원이 핵폐기장 적합 부지라고 지정한 위도 치도리 일대는 지하수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한수원은 2주간에 걸쳐 충실한 과정이 생략된 ‘졸속 조사’로 적합을 판정했다.ⓒ부안21

▲한수원이 핵폐기장 적합 부지라고 지정한 위도 치도리 일대는 지하수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한수원은 2주간에 걸쳐 충실한 과정이 생략된 ‘졸속 조사’로 적합을 판정했다.ⓒ부안21

 

7

1시간이 넘게 서씨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오니 눈앞에 놀랄만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바로 앞의 섬 큰딴치도와 작은딴치도가 육지로 연결된 것이다. 서씨는 하루 두 번씩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 하였다. 바닷물은 두 섬 넘어까지도 갯벌로 드러내놓고 한참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한수원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치도 뒤로 항구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그림을 그려놓았다. 만조가 된다해도 수심은 3~4미터 밖에 안될텐데 이곳에 어떻게 항구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인가. 시일이 촉박하여 자세히 조사도 해보지 않고 지도보고 급조한 위도프로젝트가 안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를 하고 놀았던 모래펄 갯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갯벌에 들어섰다. 과연 발이 푹푹 빠지는 뻘이다. 겁많은 칠게들이 각자 제구멍을 찾아 줄행랑을 놓는다. 위도에서 새만금 방조제까지는 대략 30km쯤 된다. 어족자원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었다. 방조제 안팎에서 동시에 뻘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영향이 서해 어장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산, 들, 바다의 고장’ 부안은 이제 바다가 가장 먼저 망해버린 것이다. 문포, 새포, 장신포, 송포, 고사포, 마포, 원포, 격포, 통포, 석포 등 변산반도의 포구들은 이제 곧 다 망해버릴 것이고 어촌 주민들은 도회지로 떠나 막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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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리 마을 뒤로 작은 언덕을 넘어 지질조사를 한다고 관정을 뚫어놓은 곳을 가보기로 하였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길게 이어지는 골짜기를 따라 논들이 나타났다. 이곳은 위도에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곳으로 2년 전 진리에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위도 주민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부안군수가 시추 허가를 해주지 않자 한수원은 전라북도에 이 문제에 대해서 행정심판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6월 28일부터 개인 사유지에서 지하수 개발명목으로 시추허가를 내도록 하여 약 1주일간 모두 5곳을 시추하여 관정을 뚫었다. 다음은 7월 13일자 <전북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방사성 폐기물관리시설 후보지인 부안군 위도면 일대의 부지조사 결과 적합 판정이 내려졌다. 산자부는 지난달 28일부터 1주일여에 걸쳐 위도지역 일대에 대한 지표지질조사 결과 방폐시설로 적합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11일 부안군에 통보했다. 지표지질조사는 부지중심 반경 10㎞에 걸쳐 암석과 단층 등의 지질구조를 관찰해 지반의 안전성 등을 검토하는 작업으로, 위도에 대해서는 5개 지점서 시추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핵폐기장은 지하수맥 위에 짓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수맥이 흐르면 구조물에 영향을 미치고 방사능이 누출되면 수맥을 따라 쉽게 오염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대만이 핵폐기물을 북한으로 떠넘기려 할 때 정부는 지하수맥을 따라 남쪽까지 오염된다는 점을 내세우며 적극 저지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물구덩이 위에 짓겠다니 어찌된 일인가. 시추공에서 양수기로 물을 뽑아낸 흔적이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두 개의 관정을 확인하였는데 거리는 불과 50여미터 떨어져 있었다.

미국에서는 사막지대에 폐기장을 만들려고 20년 동안을 구멍을 뚫고 지질조사를 했지만 적지를 못찾았다는데 어떻게 1주일만에 조사를 끝내고 또 닷새만에 적합 판정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부안은 지진 다발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지근 거리인 고군산군도는 지층 불안정 이유로 후보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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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내려와 남쪽으로 난 일주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데 가는 곳 마다 절경이었다. 기암절벽이 있는가 하면 보길도에서와 같은 미영금에서의 몽돌해수욕장과 깊은금에서와 같은 몽돌보다 더 작은 콩돌해수욕장이 있었다.

핵폐기장 문제로 오늘 이 섬에 왔건만 새만금 개발역신이 섬 주위를 포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핵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보았다. 새만금과 위도는 결국 하나이다. 새만금으로 황폐화된 어장이 위도 어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였고 이들을 빚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나서서 위도 주민들을 대신하여 어장 황폐화로 인한 피해보상이라도 받게 해주면 위도 주민들의 맺힌 한이 조금은 풀릴 것이라는 서씨의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섬을 나왔다.

반핵운동에 대해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이에 대해 한 환경운동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반핵운동의 논리를 살피지 않은 상태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주민운동만을 가지고 지역이기주의라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이 세대의 편의를 위해 수십만 년 지속될 핵폐기물을 남기는 것은 세대이기주의이며, 도시 중심의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아름다운 산천을 훼손하며 햇발전소와 핵폐기장을 짓는 것은 도시이기주의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핵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32개국 가운데 핵발전소를 추가 건설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하여 일본, 중국, 인도 네 나라 뿐이라고 하며,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은 핵발전소 가동을 중단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우리의 핵정책도 과감한 전환이 절박한 시점에 와 있으며 국민들도 핵으로부터 오는 위험 불감증에서 벗어나 핵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03년 7월)

/허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