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쟁이국은 복숭아꽃이 지기 전에 먹어야…

    부안사람들이 ‘복쟁이’라고 부르는 복어는 볼록한 배, 맹렬한 독으로 상징된다. 허지만 복어만큼 맛 좋은 생선이 또 있을까? 육질이 쫄깃하고 지방이 적기 때문에 맛이 담백할 뿐 아니라, 비타민B가 풍부하여 영양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또 미나리를 듬뿍 넣고 끓인 국은 해독작용을 하기 때문에 숙취에 아주 그만이다. 그러나 복어가 가지고 있는 “테트로드톡신”이라는 독은 맹렬해서 복어 무리 이외의 모든 동물이 죽을 정도의 무서운 독이다. 그러기에 예전에는 복어를 잘 먹지 않았다. 그물에 걸려든 복어들은 처치곤란으로 모조리 갯바닥에 버려졌다. 그 무렵에는 ‘누구네가 복쟁이국 잘못 먹고 …

비안도 크네기 갈치 배때기 맛 못 잊어…

    자라면서 제일 많이 먹었던 생선을 꼽는다면 아마도 갈치일 것이다. 보리고개 넘던 시절에 갈치를 많이 먹고 자랐다면 꽤나 잘사는 집안으로 오해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갯가 마을에서 자란 덕이다. 내가 자란 변산의 마포 해안에는 드넓은 갯벌이 건강하게 발달되어 있다. 그 곳에는 어살이 두 곳에나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바로 그 어살이었다. 우리들은 갯가에서 공도 차고 망둥이 낚시도 하며 놀다가 물때가 되면 어살로 달려갔다. 물때에 맞춰 어살에 걸린 고기들을 다 잡아 올리려면 바쁘기 마련으로 우리가 좀 거들어 줄랴치면 어살 주인은 …

東海夫人

    홍합하면 포장마차가 생각난다. 추운 겨울 날 포장마차에서 맛보는 뜨끈한 홍합국물은 그렇게 시원하고 담박할 수가 없다. 소주 한 잔 하면서 안주로 홍합 살을 꺼내 먹는 맛도 달고 고소한 게 그만이다. 그런데 이럴 때면 친구들 사이에 농이 오고간다. 여성의 그것을 꼭 닮은 데다 털까지 나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옛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본초강목에는 홍합을 일명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서해는 중국에서는 동해가 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동해에서 나는 부인의 그것과 같이 생긴 것이라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듯 하다. …

[이용범 연작 시]지운 김철수5 – “마오쩌둥의 부음 듣고 심장 아렸습니다”

일본 유학 중에 사귄 의제 허백련의 기록에 보면, 김철수는 매사가 분명하여 일본 학생들과도 싸움이 잦았으며 유학생들 중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는 일본에 있는 조선 청년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사 三宅雪嶺씨를 초빙, 시국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三宅의 강연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병하여 사이좋은 형제국이 되었듯이 일본과 조선도 그와 같은 사이라는 내용이었다. 맨 앞좌석에서 강연을 듣던 김철수는 강연 도중에 일어나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것은 강연이 아니오. 이런 강연은 들을 필요가 없으니 三宅은 내려가시오. ”김철수는 큰 소리로 외치며 三宅을 떠밀어 내려하였다. “끝까지 강연을 들어봅시다.”강연을 …

[이용범 연작 시]지운 김철수4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식민지 시대에 의식 있는 청년들은 어느 곳에 있거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머리 둘 곳 없는 외로움이 있었고 민족의 해방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1915년에는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첫 비밀 결사인「裂指동맹」을 결성하였다. 장래 사방으로 흩어져서 독립운동을 할 것과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연락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 뒤 두번째 비밀결사는 한국인 10명, 중국인 20명, 대만인 10명이 모여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중국, 조선, 대만의 동지들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민족 문제로 고민하던 김철수는 식민지 시대에 겪는 고통의 근원은 …

문루(門樓)에서 피어난 명인(名人)들의 시문(詩文)-2

부안읍성 남문루의 이름은 취원루(聚遠樓)다. 이 취원루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의 누정(樓亭) 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취원루(聚遠樓) :곧 성의 남쪽 문루인데 서쪽으로 변산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聚遠樓 : 卽城南門樓 西對邊山 北望大海 東南臨大野> 하고 이행(李行)과 허종(許琮) 두 사람의 남문루에 올라 지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1887년에 부안의 유림들에 의하여 간행된 군지 <부안지(扶安志)>의 누정 조에는 남문루를 후선루(侯仙樓)라고 기록하고 일명 취원루 라고도 한다 하였으며 1932년에 역시 유림들이 간행한 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의 누정 조에도 <부안지(扶安志)>와 같은 내용으로 적고 …

문루(門樓)에서 피어난 명인(名人)들의 시문(詩文)-1

부안읍성에는 동․서․남 세 곳에 외부로 드나드는 성문의 다락(城門樓)이 있었으며 동문의 다락은 청원루(淸遠樓)라 했고, 서문의 다락은 개풍루(凱風樓)며 남문 다락은 취원루(聚遠樓)또는 후선루(候仙樓)라 하였다. 이들 성문은 성안 사람들이 외부로 나다니는 문이요, 외부인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로 안과 밖의 경계점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계(淨界)와 부정계(不淨界)를 구획 짓는 문으로 깨끗하고 착한 것만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성안에서의 삶은 안온(安溫)하며, 평화스러워야 하고 풍요와 자손의 번창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성문거리에는 성안 사람들의 지킴이신인 오리 솟대당산과 성문 지킴이인 장승신장(長丞神將) 한 쌍씩을 돌로 조성하여 세워 놓고 있다. …

부안읍성(扶安邑城)의 규모와 특징

부안의 진성(鎭城)이라고도 하는 부안읍성이 15세기 초에 어떤 이유로 주변의 다른 여러 고을의 읍성들 보다도 그 규모가 4․5배 이상 더 크고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읍성(全州邑城)보다도 3배가 넘는 큰 성곽으로 축조 되었을까에 대하여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부안지방에는 백제(百濟)때부터 고려(高麗)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성곽들이 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확인 실측된 성지(城址)의 수만도 15개소나 된다.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부안진성(扶安鎭城)인 부안읍내의 읍성을 비롯하여 흔히 고성(古城)이라 하는 행안면 역리산 토성지(驛里山土城址)와 옛 보안현의 치소성 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안면 영전리 …

변산에 심은 오건의 작은 꿈 하나

  농촌이 해체되는 이즈음에 서울에서 내려와서 부안에서 농사지으며 농촌을 살려보고자 온몸을 던지고, 이곳에 뼈를 묻은 사람이 있다. 오건(吳建: 1948~1991)은 1948년 10월 2일에 소설가 오영수와 교사인 어머니 김정선 사이에서 2남 2녀 중 세 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80년대 민중 판화가로 활동하다가 요절한 오윤이다. 오건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자랐다. 1974년에 부안에 내려와 변산면 도청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91년 1월 21일 죽기까지 변산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지었다. 상록수를 꿈꾸다 오건이 살던 집 뒤편 양지바른 묘 앞의 소박한 상석은 따뜻한 글씨로 그를 기린다. 여기 …

해창다리, 흑백사진 한 장

변산사람들은 오늘도 흑백사진으로 남아 그 때의 감동을 전한다. 해창다리 건너 격포로 간다. 사람들은 해창다리라 부르나 관에서는 변산교(邊山橋)라 이름 한다. 이 다리는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뒤 몇 차례 변화를 겪은 밋밋한 콘크리트 다리이다. 이 다리를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을 봤다. 1980년에 변산문화협회에서 편찬한 『부안 향토문화지』에는 ‘변산교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흑백 사진이 한 장 나온다. 소화(昭和) 12년(1937) 8월 28일에 거행된 해창다리 개통식 광경이다. 다리 끝에는 신사복 입은 사람들이 서 있고 그 뒤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이 길과 주변 산 위를 빼곡히 덮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