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읍성 남문루의 이름은 취원루(聚遠樓)다. 이 취원루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의 누정(樓亭) 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취원루(聚遠樓) :곧 성의 남쪽 문루인데 서쪽으로 변산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聚遠樓 : 卽城南門樓 西對邊山 北望大海 東南臨大野>
하고 이행(李行)과 허종(許琮) 두 사람의 남문루에 올라 지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1887년에 부안의 유림들에 의하여 간행된 군지 <부안지(扶安志)>의 누정 조에는 남문루를 후선루(侯仙樓)라고 기록하고 일명 취원루 라고도 한다 하였으며 1932년에 역시 유림들이 간행한 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의 누정 조에도 <부안지(扶安志)>와 같은 내용으로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취원루(聚遠樓)라는 원래의 이름이 357년 후인 <부안지>에서는 후선루(侯仙樓)로 바뀌고 원 이름 <취원루>가 격하되어 『일명(一名) 취원루』로 뒤바뀐 것인데 어느 때부터 무슨 연유로 누구에 의하여 그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요즈음 일부의 인사들이 원 이름 취원루는 언급도 없이 뒤에 붙혀진 후선루를 사용하고 있음은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남문루에서 바라보는 동남방은 드넓은 들녘이다. 멀리 고부(古阜)의 두승산(斗升山)과 천태산(天台山) 밑까지 기름진 평교 평야가 펼처저 있고 그 가운데로 한가닥 젖줄처럼 고부천이 북북서로 흐른다. 서문이 서해의 해산(海産), 어패류와 변산의 시초(柴草) 산과(山果) 등의 출입의 문으로 시끌덤벙 한 성문거리를 이루었다면 남문은 쌀과 농산물 농사꾼들의 출입이 분주한 남문거리였다고 할 것이다.
남문루가 있었던 위치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동문루나 서문루의 경우 성문거리로부터 안쪽으로 60여m 쯤에 솟대당산 등의 수호신 석조물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문도 그랬을 것으로 추정 한다면 남문안 솟대 당산이 서 있었던 동초등학교 남측으로부터 약 60여m 거리인 남인당 한약방과 낭주식당의 중간 쯤에 남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성문의 바로 안쪽에서 문지기 장군의 기능을 하였던 장승신장이 남문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원래부터 지킴이장승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는지 아니면 있었는데 망실되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가 없다 다만 원추형태의 석간(石竿.) 솟대당산 하나가 거대한 거북좌대 위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남문루에 오른 이행(李行 : 1352~1432)은 남문루 앞에 펼처진 경관의 아름다움을 보고 시적 감회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높은 봉우리는 석보(石堡)를 이고 있고,
하늘(象緯)은 누 가운데 닿았네
바다 위 돋은 해는 벌겋게 물결 흔들고,
구름 잠긴 산은 푸른 것이 공중을 찌른다.
옷 가다듬고 세속 먼지 털어버리니,
환골(換骨) 되어 신선궁에 오른 듯하네.
해질녁에 긴 수풀 아래서는
두 겨드랑에 선선한 바람 스며든다.
高峰戴石堡
象緯逼樓中
海日紅搖浪
雲岑翠揷空
振衣擺俗累
煥骨上仙宮
向晩長林下
冷冷兩腋風
이행(李行)이란 사람은 고려말의 중신으로 탐나 제주도를 고려에 귀순케 하였으며 조영규가 정몽주를 살해함에 조영규를 만고의 흉인이라 규탄 상소하고 고려가 이성계에 의하여 망함에 예천동(醴泉洞)에 숨어 태종(太宗) 이방원의 수차에 걸친 출사 간청에도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충신이었다.
그런데 1358년(고려 공민왕 7년)부터 1908년(조선조 순종 2년)까지의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낸 분들의 명단에 의하면 태종 3년에서 4년까지 전라감사를 지낸 또 다른 이행(李行)이란 사람이 보인다 그러나 이태조(李太祖)가 교유(敎諭 : 왕이 지방관 등에게 내리는 명령서)의 글을 청하여도 거절하였고, 태종의 간청에도 벼슬에 나오지 않은 이행(李行)이 전라감사를 하였을 리 없으므로 전라감사 명단에 보이는 이행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닌가 하며 취원루에 올라 위의 시를 지은 이행은 앞에 소개한 고려말의 충신인 이행일 것이다. 그런 충절 있는 분의 글이기에 <동국여지승람>에도 소개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허종(許琮 : 1434~1494)이 취원루에 올라 시를 지어 읊었다. 허종은 성종(成宗) 때에 우의정을 지낸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명재상이다. 그 동생 허침(許琛) 또한 좌의정을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형제양상(兄弟兩相)이라 칭송하였는데 키가 11척 2촌의 거구에 얼굴이 웅장하고 이마가 넓으며 수염이 아름다운 풍채로 문무를 겸비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북방 국경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는 등 문무직을 훌륭히 수행하여 세조(世祖)가 매양 총애한 분인데 어떤 연유로 부안에 들려 남문루에 올라 노닐며 봉래산(邊山)을 그리는 호쾌한 시문을 남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누 바람 불어 흥취가 유연한데
해 저문 들 밖엔 말 한필 오는구나
아득하게 외로이 뜬 배는 어데로 가는가
그대에게 부탁하여 같이 타고 봉래산 찾아 가련다.
高樓風滿興悠哉
日暮平郊獨馬來
漠漠孤帆何處去
憑君同載訪蓬萊
이상과 같이 우리는 1416년 부령현이 보안현과 합병되어 부안현으로 확충 생성된 이후 부안 행정의 중심지가 성황산을 중심으로 하여 평산성(平山城)으로 축성된 부안읍성으로 옮겨진 것과 읍성의 크기, 동, 서, 남의 세 성문루와 그 위치, 그리고 이들 문루와 관련하여 역사적인 명사(名士)들이 내방하여 문루에 올라 부안을 노래한 시문(詩文) 몇 편을 살펴보았거니와 500여 년 전에 남긴 이들 시문에 담겨진 문예적(文藝的)인 가치는 물론이요 그 역사성 또한 부안에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어서 긍지를 갖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 목, 도호부, 군현으로 이루어진 당시 전국의 행정구역 330개소 중 행정성인 읍성으로 축성된 성의 수가 반수가 넘는 179개소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읍성의 누정조에는 대부분 명인(名人)들의 시문 몇 편씩이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문의 누정은 침입하여 오는 외적을 막는 전투의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시회(詩會)도 열고 산천의 경계도 완상하는 선비들의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되어 왔었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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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5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