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에 심은 오건의 작은 꿈 하나

 

농촌이 해체되는 이즈음에 서울에서 내려와서 부안에서 농사지으며 농촌을 살려보고자 온몸을 던지고, 이곳에 뼈를 묻은 사람이 있다. 오건(吳建: 1948~1991)은 1948년 10월 2일에 소설가 오영수와 교사인 어머니 김정선 사이에서 2남 2녀 중 세 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80년대 민중 판화가로 활동하다가 요절한 오윤이다. 오건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자랐다. 1974년에 부안에 내려와 변산면 도청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91년 1월 21일 죽기까지 변산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지었다.

▲오건의 묘, 그가 손수 지어 살던 전북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집 뒷동산에 오건은 묻혔다.ⓒ부안21
▲변산면 도청리 담쟁이 넝쿨에 둘러싸인 오건이 살던 집. 지금은 오건의 부인 이준희 씨가 혼자 살고 있다.ⓒ부안21

상록수를 꿈꾸다

오건이 살던 집 뒤편 양지바른 묘 앞의 소박한 상석은 따뜻한 글씨로 그를 기린다.

여기
우리들 가슴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을
농민 오건 잠들다.

오건의 집은 서울 우이동에 있었다. 오건은 어렸을 때부터 별의별 채소를 다 심으니 어머니가 푸성귀를 시장 가서 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동국대 농대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오건의 뜻대로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 재학 때는 ‘농촌문제연구소’와 4H에서 활동했는데 주변에서는 이러한 오건의 활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변산에서 농사짓고 살던 때의 오건의 모습. 벼(통일벼)의 알곡을 두드려 털고 있다.ⓒ부안21

대학 때부터 제주도, 부산, 서해 외딴섬까지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상록수의 꿈을 키울만한 농장터를 물색하러 다녔다. 1974년 결혼하고서 닷 새만에 아내 이준희와 변산으로 내려왔다. 산지여서 개간이 필요하고 평평한 밭을 가져야 농사짓기도 수월하기 때문에 비탈 밭을 평지밭으로 만들기 위해서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캄캄할 때까지 일 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쌀 한 가마니를 먹고 나서 그 뒤 7년 동안 보리밥만 먹었다. 그는 이웃 농민들의 절반 정도가 쌀밥을 먹고, TV를 갖는다면 그때 가서 자신도 쌀밥을 먹고 TV도 갖겠다고 했고 죽기 전까지 TV를 갖지 않았다.

 

사회운동에 눈뜨다

10년간 농사일을 했지만 어렵게 키운 자식 같은 농작물이 생활이 되지 못하는 허망함과 농민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궁핍 속에서 사회구조를 생각하였다. 1970년대에 기독교 쪽에서 주관했던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는 농촌교육 프로그램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민 문제에 대한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그 강연회를 통해 오건은 지금까지 가졌던 인식이 크게 바뀌어, 현재 겪고 있는 농민들의 고통은 바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연유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부안의 농민운동이 태동하게 되었고 당시 강연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1984년부터는 김제의 ‘기독교농촌개발원’에서 농민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오건의 아버지 ‘갯마을’의 작가 오영수 씨ⓒ부안21

농민운동사에 오건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농민운동과 정농운동을 결합하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풀무농장에 있다가 변산에 내려온 정경식은 오건의 농장에 내려와 무농약 유기농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운동가로부터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다. 유기농은 부르주아를 위한 농법이며 현재는 농민의 권리를 찾는 게 중요하지 한가하게 고급스런 농사를 지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뜻있는 몇몇은 유기농을 지켜가려는 노력과 생명의 먹거리를 만들려는 마음으로 농사를 계속하였다.

▲형 오윤과 함께. 그의 형은 80년대 민중 판화가로 활동하다가 요절했다.ⓒ부안21

 

아버지가 말하는 어린 상록수

아버지는 어려운 길을 가는 아들을 잊지 못하여 자주 변산에 내려왔다. 이러한 아들 부부의 얘기를 ‘어린 상록수’라는 소설에 동화처럼 담았다. 이 소설은 변산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자식이 급히 필요하다는 돈을 마련해 와서 아들 내외가 흙과 뒹굴며 고단하지만 꿋꿋이 농사짓는 대견한 모습을 보고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전송 받는 것으로 끝난다.

“비가 또 오기 시작한다. 아이놈 내외는 길옆 가게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면서 나란히 서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손수건으로 유리를 훔치고 손짓으로 돌아가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이들도 뭐라고 하는 모양인데 차 발동소리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러고도 제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룰 수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는 믿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종교도 신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돌려 눈을 감고 차에 흔들렸다. 왠지 눈시울이 뜨뜻해왔다.”

▲오건은 변산면 도청리 사는 복원 씨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부안21

오건은 글을 쓰는 이론가이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려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글은 희귀할 수밖에 없는데, 1985년에『남민(南民)』에 발표한「전북 농민운동의 현황과 과제」라는 글은 농민운동에 대한 애정과 전망을 담은 실천주의자의 글이다.

오건은 간경화로 45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상록수를 꿈꾸고 변산에 내려와 농사일에만 전념하다가 농민운동에 관여하고, 다시 유기농에 그의 ‘작은 꿈’을 실었다. 이러한 오건의 꿈과 희망은 정경식, 이백연을 비롯한 한울공동체 식구들이 오건의 집 자리를 비롯한 변산 이곳저곳에서 유기농의 생명농사로 이어가고 있다. 지금 변산에는 유기농을 하며 오건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담쟁이 넝쿨에 둘러싸인 오건의 집이 햇빛을 받으며 소박하게 남아 있다.

/정재철

2005·05·12 2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