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다리, 흑백사진 한 장

변산사람들은 오늘도 흑백사진으로 남아 그 때의 감동을 전한다.

▲1937년 8월 28일, 해창다리 개통식 광경

해창다리 건너 격포로 간다. 사람들은 해창다리라 부르나 관에서는 변산교(邊山橋)라 이름 한다. 이 다리는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뒤 몇 차례 변화를 겪은 밋밋한 콘크리트 다리이다. 이 다리를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을 봤다.

1980년에 변산문화협회에서 편찬한 『부안 향토문화지』에는 ‘변산교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흑백 사진이 한 장 나온다. 소화(昭和) 12년(1937) 8월 28일에 거행된 해창다리 개통식 광경이다. 다리 끝에는 신사복 입은 사람들이 서 있고 그 뒤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이 길과 주변 산 위를 빼곡히 덮고 있다. 어떤 사람들일까? 변산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 농사가 주업이나 바다도 나 다니는 겸업농들, 산에 살면서 가끔 밖으로 나오는 산전을 가꾸거나 약초를 캐며 살던 안변산 사람들. 다리 하나 만든 것이 동네방네 소문이 나고 집에 있던 아이들 까지도 모이게했을 큰 구경거리, 해창다리.

해창은 변산 들어가는 길 목

해창(海倉)은 부안읍에서 변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그마한 항구이다. 옛날에는 나라의 창고가 있었던 곳이고, 어패류의 구판장이 설치되어 어선이 드나들던 어항이었다. 이 해창으로 흐르는 강이 해창천이고 이 강을 건너는 해창다리는 하서면 백련리와 변산면 대항리를 이어준다.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부안읍에서 변산으로 가려면 신작로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털털거리는 자동차를 타거나 소달구지를 끌고 이곳까지 와서 승객들과 짐을 모두 강가에 내려놓고 나룻배로 갈아타고 강을 건넌다. 나룻배를 탈만한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산 고개를 넘어 먼 길을 돌아다녔다. 해창다리가 만들어지면서 이제 사람들은 나룻배를 탈 필요도, 힘들게 산봉우리를 타고 고개를 넘어 다닐 이유도 없어졌다.

해창은 중계 백천내의 물이 이곳을 거쳐 바다로 빠져 나가니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면서 고기의 종류도 다양한 실한 어장이었다. 이곳은 안변산의 물이 모여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배설구이기도 하다.

해창다리 건너다

해창에 다다르면 해창산이 새만금에 몸을 내준 채 상채기를 간직한 채 남아 있고 몇 년 전까지 보였던 검고 퇴락한 어판장 건물은 없어졌다.

오늘도 강을 건너듯이 고마운 해창다리 건넌다. 사진을 본 뒤에는 그냥 건너기에는 아까운 다리라며 건넌다. 이곳에서 70년 전에 다리 개통을 지켜보던 흰옷 입은 사람들 만난다. 그 때 사람들은 끊어진 길 이어준 다리 하나가 요란한 말이나 구호보다 고마웠을 것이다. 그 때는 식민지 시대. 하루 먹고 살길도 막막한 시대. 머리 좋은 사람, 돈 있는 사람 이득 있는 일본에 많이도 붙어 버리고 고마운 독립운동가들 해외로 떠돌며 고국 사랑한 까닭에 목숨 내 버리는 어두운 시대.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 고마운 해창다리 건너며 살길 찾아 나선다.

다리 개통식에 참여한 변산 사람들은 오늘도 흑백사진으로 남아 그 때의 감동을 전한다.

/정재철

2005·04·24 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