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루(門樓)에서 피어난 명인(名人)들의 시문(詩文)-1

▲부풍승람에 청원루, 개풍루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부안21

부안읍성에는 동․서․남 세 곳에 외부로 드나드는 성문의 다락(城門樓)이 있었으며 동문의 다락은 청원루(淸遠樓)라 했고, 서문의 다락은 개풍루(凱風樓)며 남문 다락은 취원루(聚遠樓)또는 후선루(候仙樓)라 하였다. 이들 성문은 성안 사람들이 외부로 나다니는 문이요, 외부인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로 안과 밖의 경계점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계(淨界)와 부정계(不淨界)를 구획 짓는 문으로 깨끗하고 착한 것만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성안에서의 삶은 안온(安溫)하며, 평화스러워야 하고 풍요와 자손의 번창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성문거리에는 성안 사람들의 지킴이신인 오리 솟대당산과 성문 지킴이인 장승신장(長丞神將) 한 쌍씩을 돌로 조성하여 세워 놓고 있다. 이들 지킴이 신들은 성안 사람들의 풍요와 번창은 물론이요, 잡귀와 병마의 역신(疫神), 흉악한 도적. 그리고 모든 부정한 것들의 침입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부안읍성의 세 성문 중에서 제일 번화한 성문은 동문이었다. 성안 사람들이 동북방면인 서울이나 김제, 전주 등으로 나들이 하려면 동문으로 출입하였고, 부안을 찾는 외지의 사람들 또한 동진나루를 건너 이곳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문은 읍성의 큰문이요 부안 문물(文物)의 중요한 통문(通門)이었다.

동문인 청원루(淸遠樓)의 위치는 지금의 동중리와 선은동의 경계 근처인 동문안 당산의 석장승 한 쌍이 서 있는 곳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문거리의 장승은 수문장적(守門將的)인 기능으로 세워졌으며 성문의 입구 바로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동문루는 조선조 초기인 성종(成宗)때의 현감 성수겸(成守謙)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감 성수겸이 그때 서문루와 남문루도 함께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수겸이 1486년 1월부터 1491년 2월까지 5년간 재직한 현감이었으니, 서문루나 남문루도 그가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지며 부안읍성의 석축축성도 이때에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부안읍성의 세 문루에는 거유(巨儒).명인(名人)들이 올라 노닐며 남긴 시문(詩文)들이 전해오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리학의 거유(巨儒)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부안에 와 청원루와 개풍루에 올라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소쇄함은 참으로 팔영루(八詠樓)와 같은데
순식간(咄嗟)에 지은 화려한 누각 성후(成侯)를 하례 하네.
외딴 마을 조석(潮汐)은 시 읊는 강가에 응하고
먼 산 굴의 구름 안개 바라보는 속에 걷히네.
공무를 벗어나서 마음 놓고 술잔 잡는데
무덥던 김 힘 없어지니 가을에 놀랬노라.
돌아가기 허락 받은 병든 손이 맑은 흥에 취하여
바닷머리 장기(獐氣)속에 머무른 줄 깨닫지 못했노라.

瀟灑眞同八詠樓
咄嗟華構賀成後
孤村潮汐吟邊應
遠峀雲嵐望裏收
簿領解圍聊把酒
火敞無力忽驚秋
賜環病客乘淸興
不覺淹溜漳海頭

이 시중에 “순식간(咄嗟)에 지은 화려한 누각 성후(成侯)를 하례 한다”에서 성수겸이 읍성을 축성하고 성문의 문루까지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후(成侯).>란 당시의 부안현감 성수겸을 지칭한 말이다. 김종직(金宗直)은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문장과 경술(經術)이 뛰어난 학자였으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수많은 명유(名儒)를 길러냈고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건으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묘를 파 관을 꺼내어 시신을 토막 내는 형벌)를 당한 분이다. 위의 시로 보아 김종직이 죽기전 3~4년 전에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부안에 와 동문에 올라 노닐면서 성문루에서 바라보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서문의 이름은 개풍루(凱風樓)라 했다. 서문이 있었던 위치는 지금의 원불교 교당 입구로부터 서쪽으로 50여m, 옛 청우학교 입구쯤에 있었다. 바로 그곳에 성문거리 장승인 석장승 신장 한 쌍이 성문을 사이로 하고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던 것을 일제 때 신작로를 내면서 뽑아 그 옆 민가의 처마 밑에 세워두었으므로 성문 위치가 거기였음을 알 수 있다. 서문은 주로 변산과 서해바다의 시초(柴草)와 어염(魚塩) 등이 들어오는 문이었으며, 상서, 하서, 보안, 줄포, 흥덕, 고창방면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이곳에도 석조신간(石造神竿)의 오리 솟대당산과 문지기 장승이 성안을 수호하는 지킴이 신으로 조성 배치 되어 있다. 김종직(金宗直)은 서문의 누각에도 올라 시를 남겼는데 서문 저쪽 서해바다를 매우 인상적으로 노래하고 자신의 전라감사 2년동안(棠發二年) 근무한 일을 뒤돌아 보았으며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김종직이 1487년(성종 18년)부터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부안에 들렸던 것이 확실하다.

개풍루 위 마음대로 올라 와 보니
발해(渤海:서해)동쪽 빈터는 지형 더욱 깊숙하네.
낛싯대 두 길이 솟은 해는 붉으스레 은은하고
천 두락 맑은 못 일천 이랑(頃:1경은 백마지기)에 푸른 것이 침침하다.
거민(居民)들은 고기잡이의 이익을 다투어 찾는데
게으른 손은 상궐(象闕:하늘 같은 대궐)에만 마음이 달려 있네.
당발 2년(棠發:감사)에 무슨일 하였나
난간에 의지하여 이런대로 세상 마음 씻노라.

凱風樓上恣登臨
勃海東堧地更深
旭日兩竿紅隱隱
淸池千頃翠沉沉
居人竟遂魚梁利
倦客長懸象闕心
棠發二年何事業
憑欄無聊且虛襟

위의 김종직 시를 읽어 보면 발해(勃海)즉 서해, 낛싯대, 넓은 바다라는 뜻의 청지천경(淸池千頃)그리고 고기잡이에 바쁜 어부들에 관하여 노래하고 있어, 읍성 서문밖이 이내 바다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서문거리의 성격이나 정경을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2005·06·10 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