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진성(鎭城)이라고도 하는 부안읍성이 15세기 초에 어떤 이유로 주변의 다른 여러 고을의 읍성들 보다도 그 규모가 4․5배 이상 더 크고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읍성(全州邑城)보다도 3배가 넘는 큰 성곽으로 축조 되었을까에 대하여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부안지방에는 백제(百濟)때부터 고려(高麗)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성곽들이 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확인 실측된 성지(城址)의 수만도 15개소나 된다.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부안진성(扶安鎭城)인 부안읍내의 읍성을 비롯하여 흔히 고성(古城)이라 하는 행안면 역리산 토성지(驛里山土城址)와 옛 보안현의 치소성 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안면 영전리 토성지(英田里 土城址). 희안현(希安縣)때의 치소성이었다 하여 “씨안”이라 불리워지고 있는 유천리 토성지(柳川里土城址). 성메라 불리우는 부곡리 토정지(富谷里土城址). 그리고 나당(羅唐)의 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한 백제의 부흥군들이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하는 주유성(周留城)이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 상서면 개암사 뒤의 우금산성지(禹金山城址)가 있으며, 백산면의 백산 토성지(白山土城址), 줄포시내 동변에 있는 장동리 토성지(壯洞里土城址), 주산면 사산리 토성지(士山里土城址)와 소산리 토성지(所山里土城址), 계화면의 염창산 토성지(塩倉山土城址)와 수문산 토성지(修文山土城址), 구지산 토성지(九芝山土城址), 동진면의 후당리 토성지(後堂里土城址)와 반곡리 토성지(盤谷里土城址) 등이 그것이다.
이들 성곽들은 지금은 모두 망가지고 훼철되어 겨우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이중 우금산성과 부안읍성만이 석축성으로 규모도 컸으며, 나머지는 토성으로 규모도 고작 300내지 500여 척에 지나지 않는 성곽들이다. 그러면 먼 옛날부터 부안지방에는 왜 이렇게 성곽들이 많았을까, 성곽의 축조목적이 반드시 외적 침입의 방어적 전투만을 목적으로 집단의 안전과 안온한 생활 터전의 유지를 위한 울타리적 경계(境界)축조물이기도 하지만, 부안지방의 사정은 좀 다르다. 그 지리적 지형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여서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이 많았으며 특히 왜구(倭寇:일본인 해적)들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고려의 말경 우왕(禑王) 초에는 왜구 50여척이 진서면 곰소로 침입하여 보안현을 점령하고 적현(狄峴:지금의 유정재)을 넘어 부령현까지(당시 치소는 행안면 역리부근)점령하고 동진교(東津橋)를 헐어버린 일까지 있었으니 부안읍성이 규모가 유난히 크고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성되기 불과 40여년 전의 일이어서 이 지방에 성곽이 많고 읍성이 크게 축조된 이유를 짐작하게 하며, 침입하기가 용이한 동진면의 북서부와 계화면, 그리고 줄포만 연안 등을 중심으로 성곽이 많이 집중되어 있음이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부령현과 보안현이 합병한 조선조 초기는 고려말 왜구들이 우리나라 해안지역의 마을들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음은 물론이요, 지리산의 운봉(雲峰)지역 내륙까지도 깊숙이 침입하여 장기간 주둔하기까지 한 직후였으므로 두 고을이 병합한 부안읍성은 좀더 크고 튼튼하게 축성하여 왜구들의 침입도 방비하고 새읍성으로서의 위용도 보여 고을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도 도모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아무튼 부안읍성은 매우 넓고 튼튼한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둘레가 16.458척이면 당척(唐尺)을 기준으로 계산하여도 약 5.5Km가 넘으며, 높이 15척이면 약 5m높이의 규모로 짐작되며, 동서남의 세곳에 성문(城門)의 누정(樓亭)을 두었는데 동문은 청원루(淸遠樓)요, 서문은 개풍루(凱風樓)며, 남문은 취원루(聚遠樓), 혹은 후선루(候仙樓)라 하였는데 북문은 없었다. 북쪽은 성황산이 둘러 있음으로 사람의 출입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성황산을 중심으로 평산성(平山城)의 형태로 축성된 부안현의 읍성 안에는 현감(오늘날의 군수)이 집무하는 동헌(東軒:군청 청사)이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에 있었는데, 패훈당(佩訓堂)이라 하였고, 그 옆 서쪽으로 내아(內衙: 현감의 숙소)가 있었으며, 동헌의 앞에는 외삼문(外三門)인 2층의 진석루(鎭石樓)가 관아의 위용을 과시 하였다. 진석누 앞, 좌측으로 너럭바위에는 순조(純租)때의 현감 박기수가 “주림옥천, 봉래동천(珠林玉天 蓬萊洞天)”이라 쓴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 고장의 문화유적을 아낄 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위에 주택이 들어서 있었으나 요즈음 부안군에서 이를 헐어버리고 다시 햇볕아래 드러나게 한 일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아닐 수 없다.
지금의 군청이 있는 곳에는 부풍관(扶風館)이란 객사(客舍)가 있었다. 객사란 각 고을에 속한 중요한 관청의 하나로 객사 중앙에는 전패(殿牌)라 하여 ‘전하만만세(殿下萬萬歲)’ 라 쓴 임금의 위패를 봉안하고 초하루와 보름으로 그 고을 사또가 임금이 계시는 궁궐을 향하여 향궐망배(向闕望拜)하던 곳이다. 즉 고을의 수령이 임금을 근무지의 현장에 모시고 왕명을 받아 백성을 정성껏 보살필 것을 매양 다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객사는 왕명을 받은 중앙 관서에서 나온 관리의 숙소로도 쓰였다. 부안현의 객사 명칭은 부안의 고호(古號: 실은 별호)를 따서 부풍관(扶風舘)이라 하였는데, 1926년에 훼철하고 그 자리에 군청을 지었다 하며『扶風舘』이라 쓴 편액의 글씨는 조선조 숙종 때의 명필, 김제 사람 송재(松齋), 송일중(宋日中)이 썼다 하는데 신필에 가까운 이 편액글씨는 지금 부풍율회(扶風律會)에 보관되어 있다.
부안의 전통문화와 유물유적의 파괴행위는 유난히 자심하여 성곽들 중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옛 관아의 자취 또한 알아보기 조차 힘들다, 아무리 일제 때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동헌과 내아를 헐고 그 자리에 왜놈들의 신사당을 짓고 객사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엔 군청을 지었으며, 작청(作廳)을 헐고 경찰서를 짓는 등 옛 문화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유별난 짓을 했던 것 같다. 충청남도 홍성(洪城)에는 옛 동헌(東軒)을 비롯한 관아의 건물, 성곽의 문루(門樓), 정원의 연못 그안의 가석산(假石山), 가석산에 세워진 정자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것도 군청 청사와 한 울안에 있으면서 그 보존 관리에 정성을 다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들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고 큰 부자가 된 듯이 어깨가 으쓱 해진다.
/김형주
|
2005·05·17 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