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뱃굿판의 참광대 고 이창영선생

  구성진 태평소 가락으로 풍어제의 흥과 신명을 이끌어… 많이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위도면 대리 마을에 전해 오는 일종의 풍어제인 마을동제가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정해진 것은 1985년 2월 1일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된 위도띠뱃놀이가 강원도 춘천시에서 열린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은 것은 1978년이었으니, 대통령상 수상 이후 근 7년 만에 국가의 중요 무형문화재로 정해진 것이다. 위도띠뱃놀이가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되기까지 여러 마을 주민의 노력과 외지 민속학자들의 노고도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이 마을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

자연과의 안전한 동행-안전사고 감소를 위한 다양한 노력

    입장료 폐지 및 주 5일제 근무와 웰빙문화 확산으로 건강을 목적으로 국립공원을 찾는 탐방객이 증가함에 따라 준비되지 않은 무분별한 산행과 부주의한 물놀이로 인한 안전사고 발생 증가가 우려되고 있다. 이에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안전사고 감소를 위한 다양한 노력의 결과 2007년 국립공원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는 1,437건으로 2006년 2,356건에 비하여 39%가 감소하였으며, 2007년 변산반도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총 35건의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여전히 안전사고 예방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안전사고의 원인은 폭우, 폭풍, 번개, 낙석, 안개 등 자연적 요인과 방심, 부주의, 판단미숙, 준비 및 경험부족 등 인위적인 요인으로 구분되며, …

정상 정복의 어두운 그림자-탐방로 훼손

    주5일 근무제 시행에 따른 여가 시간의 증가와 생활수준의 향상, 그리고 도시화의 반작용으로 인하여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간의 산악탐방은 주요 명산(名山)을 정상정복 하는 형태였으나 최근 들어 개인적인 건강증진은 물론 명상이나 경관감상, 숲 체험과 같은 형태로 다양화 되어가고 있다. 특히 2007년부터 시행된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로 인하여 국립공원 탐방객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연간 3,700만명에 이르렀으며, 변산반도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전년보다 30%이상 증가한 150여만명이 탐방하였다. 탐방객 증가는 정상정복을 위한 등산객의 증가로 이어져 탐방로 훼손 증가가 더욱 우려되고 있다. 탐방로의 훼손을 초래하는 원인은 여러 …

행안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행안산은 어디인가 행안면(幸安面)은 1914년 이전에는 없었던 지명이다. 일제의 병탄 이후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염소방과 서도방, 남상방과 남하방의 4개 면방을 중심으로 행안면이 편성되었다. 이 행안면이란 지명은 행안산(幸安山)에서 온 이름이다. 그렇다면 행안산은 어디일까? 중종 25년(1530년)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 편의 산천(山川)조에 ‘행안산은 현 남쪽 10 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932년에 간행된 『부풍승람』에는 행안산이 현(縣)에서 남쪽으로 7리였고, 일명 시어산(侍御山)으로 불린다고 했다. 김정호가 1860년대에 펴낸 『대동지지』에는 행안산과 관련된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왜구의 침범이 그것이다. 고려 우왕 2년(1376)에 왜구가 곰소에 배를 …

행정의 전문가 향리(鄕吏) 이야기 [2]

  부안고을의 향리 이야기 고을의 행정을 수행하는 중심 관청은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과 아전들의 우두머리격인 이방의 집무소인 질청(作廳:椽廳)이었다. 부안고을의 관아인 동헌은 부안군청의 뒤 지금의 중앙교회 자리였고 그 내삼문 아래 옛 경찰서 자리에 질청이 있었다. 질청의 옆 동편으로 군청 자리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와 위패(位牌)를 모신 객사(客舍)가 있었으며 서편으로 옛 교육청 자리 뒤에 형방청이 자리하고 객사 앞에 호방청이 있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군청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가 부안고을의 행정 중심지였다. 아전이란 별난 족속이 아니다. 오늘날의 도청이나 군청의 공무원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다른 점이 …

행정의 전문가 향리(鄕吏) 이야기 [1]

  향리의 뿌리는 지방의 호족(豪族)이었다 향리란 지방의 행정기구인 관아에 딸린 하급 관리인 구슬아치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 아전들은 고을의 수령인 감영(監營)이나 부목군현(府牧郡縣). 진영(鎭營). 역원(驛院)의 수령의 명을 받아 행정을 수행하는 최 일선의 행정 전문가요 오늘날의 지방공무원들이었다. 아전을 크게 나누면 임금이 정사를 펴는 중앙의 각 관서에 딸린 경아전(京衙前)과 지방관청에 딸린 외아전(外衙前)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아전이라 하면 외아전인 향리(鄕吏)를 이르는 말로 쓰고 있다. 이들의 집무소가 고을 수령의 정청(政廳)인 관아 즉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지근지처인 그 앞에 있다고 하여 아전이라 호칭 한다. 그 외에도 서리(胥吏). …

부안의 관아(官衙)와 공해(公廨)

  수령의 집무소 관아 앞에서 조선시대 부안의 행정치소인 읍성(邑城)에 대하여 그 형태와 규모, 위치 그리고 세 곳의 성문의 문루와 그에 관한 명사(名士)들의 시문(詩文)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았거니와 이와 같은 행정치소의 공간 안에는 고을의 수령이 정사를 보는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공해(公廨) 들은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고을행정이 펴져 왔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관아(官衙)와 공해(公廨)라 함은 관공서와 그에 따른 건물을 총칭하는 말이며, 고을의 수령을 비롯한 육방(六房) 관속들인 아전들이 집무하는 건물이란 뜻으로 관사(館舍)라 하기도 하고 이속(吏屬)들이 모여 고을의 일을 처리하는 곳이란 뜻으로 순수한 …

전봉준과 다른 길에 선, 부안 대접주 김낙철

  김낙철(金洛喆 1858-1917)은 부안김씨이고 자는 여중(汝仲), 동학 도호는 용암(龍菴)이다.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에서 출생했다. 쟁갈마을은 안쟁가리, 용성리, 새멀, 송학동 등 네 개 뜸이 있는데 김낙철은 새멀에서 산 것으로 보인다. 김낙철은 체격이 크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700석 정도를 거두는 부자로 글을 읽는 선비였다. 동학에 입교하다 김낙철은 1890년에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교하였다. 동학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조선 사회가 당면한 어려움의 실상을 알 수 있었고 동학을 통해 극복 할 수 있다고 확신한 듯 하다. 교도가 증가함에 따라 교주 최시형이 순회 포교에 나서 1892년 7월에 …

유형원, 부안에서 꿈을 준비하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살던 우동리 마을은 부안 김씨들의 집성촌이다. 김홍원이 유관이 국가에서 받은 땅을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으로 부터 매입한 이후 이곳은 부안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반계라는 호를 통해본 유형원 반계라는 호는 그가 살던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서 호를 따 왔다고 하나 부안 김씨 고문서에는 분명히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 이름은 장천(長川)이라고 하였다. 반계는 오늘날 중국 섬서성 보계시 동남에 있는 강물로 남산이란 곳에서 물줄기가 시작되어 북쪽으로 흘러 위수라는 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강태공이라 부르는 태공망 여상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기 전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

신선대(神仙台) 옛터

  청학동으로 간 신선대 사람들 6.25전쟁 후, 변산의 신선대에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어 18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좆아 사서삼경을 읽고, 상투, 댕기머리에 흰옷을 고집하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으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그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바로 그 곳이다. 1996년 경까지만 해도 추석 때 신선대로 성묘 오는 그들(은재필 씨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