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 부안에서 꿈을 준비하다

 

▲반계 유형원 유적지ⓒ부안21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살던 우동리 마을은 부안 김씨들의 집성촌이다. 김홍원이 유관이 국가에서 받은 땅을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으로 부터 매입한 이후 이곳은 부안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반계라는 호를 통해본 유형원

반계라는 호는 그가 살던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서 호를 따 왔다고 하나 부안 김씨 고문서에는 분명히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 이름은 장천(長川)이라고 하였다.

반계는 오늘날 중국 섬서성 보계시 동남에 있는 강물로 남산이란 곳에서 물줄기가 시작되어 북쪽으로 흘러 위수라는 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강태공이라 부르는 태공망 여상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기 전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다.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강가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태공망은 늦게나마 다행히도 문왕을 만나 주나라를 세우는 천하대업에 일조 할 수 있었다.

▲우반동 부안김씨 고문서 중의 하나로,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되시는 유성민이 김홍원에게 우반리 동변 일대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이다. ‘證 長孫 學生 德彰’ 학생 덕창이 이를 증했는데 덕창은 반계 유형원의 소년기 이름이다.

유학을 배우던 조선시대 선비라면 이런 고사를 익히 알고 있어서인지 유형원 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반계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반계라는 호는 중국고사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유형원은 15세인 1636년에 병자호란을 피하여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에 갔다. 현재 원주시 문막읍에는 반계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에는 원주에 남산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바로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우고 때를 기다리던 반계가 시작되는 곳이 남산이다. 이러한 점들이 유형원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온 원주에서 반계라는 호를 짓게 되었을 개연성을 보여 준다.

병자호란을 피해 원주로 피난 오면서 유형원은 여진족인 청에게 동방예의지국이 짓밟히는 형상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강태공이 문왕을 도와 나라를 세우듯 혁명적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부안으로 내려오다

증조부 유위는 현령을, 조부 유성민은 정랑을 지냈으며, 아버지 유흠은 28세 나이로 광해군의 복위를 꾸몄다는 무고에서 비롯된 유몽인 옥사에 연류되어 죽었을 때 한림의 요직에 있었다. 어머니는 우참찬 이지완의 딸이고 그의 처는 철산부사 심항의 딸이었다.

이러한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유형원은 어려서부터 역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 다섯 살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곱 살 때 서경을 읽을 정도였다. 이처럼 전형적인 사류로서 교양을 닦으며 유학의 연마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가족 제사 등 일체의 의례를 주문공가례에 의거하여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32살인 1654년(효종 5)겨울에 할아버지의 3년 상을 치르고 글을 지어 읊조리면서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안 우반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에 대한 기록에는,
“항상 큰배 네다섯 척을 두니 지극히 편리하였고 좋은 말을 기르니 하루에 수 백리를 갈 수 있었다. 좋은 활과 아름다운 화살과 조총 수십자루를 두어 마을 사람들을 가르쳤다.”

반계수록이 말하는 세상

▲반계수록

1652년 『반계수록』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1654년 진사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거절했고 1670년 에 반계수록을 완성했다. 이 책에서 토지제도 개혁, 시험 중심의 관리 선발제도 개선, 노비신분 세습제 철폐 등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으나 당대에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조선 후기 사상의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었다.

『반계수록』에는 그의 개혁방안이 풍부한 고증과 함께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개혁의 출발점은 역시 토지제도로서, 그 핵심은 경제의 원천인 토지가 직접 농사짓는 농민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공전제(公田制)의 실시였다. 이는 많은 농지를 소유한 채 놀고먹는 지주가 없도록 하며, 부지런히 농사짓는 농민이 굶주리는 일이 없는 획기적 방안이었다.

미수 허목이“왕을 곁에서 보좌할 만한 재목“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천재를 품고서도 뜻을 버리고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당시 사회구조의 불합리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도 천하를 경영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당산 나무가 있는 주변 논 사이에 반계의 집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고, 냇물 건너 맞은 편 산기슭에 그가 공부를 하며 『반계수록』을 썼다는 집이 있다. 이 집은 1981년에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유형원은 죽은지 1백년이 되어서야 인물됨이 알려졌으며 반계수록도 그제서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이 책에 관심을 갖고 그 초고를 읽어본 영조는 탁월한 내용에 감탄, 이를 인쇄하여 널리 세상에 알릴 것을 명하였다. 백성의 고통에 가슴 아파했던 그의 뜨거운 열정, 오직 조선의 개혁을 위해 책을 쓰며 일생을 바쳤던 그의 개혁 정신은 반계수록과 함께 과거를 현재로 삼도록 평가와 재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정재철
200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