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고을의 향리 이야기
고을의 행정을 수행하는 중심 관청은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과 아전들의 우두머리격인 이방의 집무소인 질청(作廳:椽廳)이었다. 부안고을의 관아인 동헌은 부안군청의 뒤 지금의 중앙교회 자리였고 그 내삼문 아래 옛 경찰서 자리에 질청이 있었다. 질청의 옆 동편으로 군청 자리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와 위패(位牌)를 모신 객사(客舍)가 있었으며 서편으로 옛 교육청 자리 뒤에 형방청이 자리하고 객사 앞에 호방청이 있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군청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가 부안고을의 행정 중심지였다.
아전이란 별난 족속이 아니다. 오늘날의 도청이나 군청의 공무원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신분사회였던 당시에 그 신분의 격이 양반으로 상승할 수 없었던 중인신분이요 그들이 전담하여 왔던 직종이 누구나 쉽게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직종이 아니었으며 대를 이어서 세습되는 전문직이었고 법적으로 급료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다를 뿐이다. 1790년(정조 14)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 부안현의 봉름(俸廩) 조에 의하면 당시 부안 관아의 아전 수가 59명인데 이들에게 지급하는 급료인 어록미(衙祿米)는 24석 12두 8승이라 하였으니 1인당 급료가 다섯 말 정도였다.
그러면 조선조 말을 기준으로 부안고을 아전들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향리제도에 따른 육방관속의 정원이 법규로 정해져 있지는 않아서 고을의 크기에 따라서 달랐다고 하며 나주(羅州)나 안동(安東)처럼 300여 명의 이속(吏屬)을 거느린 고을도 있었지만 잡직을 제외한 순수한 아전의 수는 대체로는 50에서 60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60년에 간행된 순창군의 <옥천군지(玉川郡誌)> 이안(吏案) 조에 의하면 향리(鄕吏)가 12명. 가리(假吏)가 48명이며 의생(醫生) 4명. 통인(通人) 28명. 병영영리(兵營營吏) 4명. 사령 32명. 군뢰(軍牢). 10명으로 138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노비 등이 제외된 이속을 망라한 숫자지만 이중 순수한 아전이라 할 수 있는 향리와 가리만도 60여 명에 이른다. 가리 또는 가속(假屬)이란 순수한 아전이 아니라 임시직으로 끼어든 아전을 말하는 것인데 순창군의 경우 임시직인 가리의 수가 원직자의 수보다 4배나 더 많은 것은 좀 특이하다.
부안은 현(縣)이긴 하지만 순창보다는 큰 고을이며 예나 이제나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고을이다. 1887년에 간행된 <부안지(扶安志)>의 관속(官屬) 조에 의하면 “형리(鄕吏)가 60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속(假屬)이다. (鄕吏六十 餘皆假屬)”라 하고 향교의 심부름꾼인 공생(貢生) 1명(貢生一 餘皆假屬). 의생(醫生) 1명. 법률을 담당한 율생(律生) 2명. 관아의 사령격인 나장(羅將) 4명.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취라치(吹螺赤) 2명. 잡무를 보는 일수(日守) 3명. 관노비 10명이라 하여 73명에 이르고 있으나 여기에 기생과 가리까지 합하면 100여 명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 외에도 역원(驛院)인 부흥역(扶興驛)에는 역리(驛吏)가 3명에 노비가 103명이었으며, 검모포진영과 격포진영 위도진영 등의 아전인 진리(鎭吏)의 수가 46명에 이르고 통인격인 지인(知印)과 사령을 합하면 50여 명이 넘었으니 부안지방의 이속(吏屬)은 대체로 300여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당시의 인구비율이나 행정업무의 규모로 보아 관아를 의지하고 빗대어 먹고 살아가는 하리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유의하여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당시 중앙정부나 지방 고을의 구슬아치 관속에는 어김없이 기생이 대기하고 있는 즉 그들의 근무처인 교방청(敎坊廳)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기록들이 읍지류 등의 공해(公廨) 조에는 보이지 않는 점이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서 약간씩은 달랐겠지만 대체로는 10여 명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부안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고을에서 왜 빠뜨리고 있는 것일까. 모든 읍지류에 이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고 있음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향리들은 고을 수령의 정청인 동헌과 가까운 곳의 성안에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부안의 경우는 동헌의 동편 노휴재(老休齋) 주변과 동문안 마을이 이들이 모여 살았던 중심지였다. 전화도 없는 시절이어서 수령의 부름이나 긴급한 지시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고 출퇴근도 편리하였기 때문에 어느 고을이나 관아 가까이에 모여 살았다.
그리고 이들 향리직은 세습직이고 전문직이어서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하여서 할 수 있는 직종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씨족의 가문에서 독점하여 왔다. 간혹 가리(假吏)라 하여 타 지역 출신이 비집고 들어온 임시직의 아전이 있긴 하였지만 이 경우도 그 사람당대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어느 특정 가문에서 독점하는 폐쇄적인 전문 직종으로 고착되어온 특성을 지닌다.
조선왕조가 망한 1910년까지 부안의 향리직을 맡아왔던 씨족의 주류는 영월신씨와 진주김씨였으며 그 외에 부안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중의 일부도 이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부안의 명기(名妓) 이매창의 아버지 이탕종(李湯從)도 아전 출신이다. 매창의 시집 발문에 “고을의 아전 이탕종의 딸이다(縣吏 李湯從女也)”라 하였다.
향리들의 생활과 여항문화(閭巷文化)
아전들의 생활은 일반 서민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으며 그럼에도 서민문화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우선 그들은 알반 서민들 속에 섞이어 살지 않았다. 관아와 매우 가까운 곳에 모여서 살았으며 혼인도 그들끼리 하였다. 따라서 한마을 혼인이 많았으며 그들 대부분이 인척관계로 얽혀 있어서 화목하게 지냈으며 이웃 고을의 이속들과도 교혼(交婚)이 잦았으니 예를 들면 고부 은씨. 태인 송씨. 만경 곽씨. 흥덕 진씨 등이 부안의 이속들과 혼맥을 이루어 왔었다.
또 향리들의 복색은 흰옷이 아니었으며 아무리 부자라도 사치스러운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가마나 말을 타지 못하였으며 갓도 챙이 좁은 것을 써야하고 산호나 수정으로 갓끈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열심이 공부시켰는데 양반들의 자제들이 사서삼경이나 시문을 익히고 과거를 위한 공부를 시켰음에 비아여 아전들의 자제들은 법률서적으로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전후속록>. <수교접록>. <대명률>. <속대전>과 범죄인에 대한 형사적 판결규정인 <결송유취>. <무원록>. <의옥집> 등을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를 시키고 그들의 특유한 문서용 문자인 이두무자(吏讀文字)와 구결문자(口訣)를 익힘은 기본이요 공초문(調書)의 작성법. 산술. 면적과 용적의 산출법. 조세의 부과규정. 호적의 작성과 정리 기타 객사의 삭망의례. 성황제. 사직단제 여단제 등 관아에서 거행하는 크고 작은 연회에 이르기까지 실로 고을의 행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온갖 기능을 어려서부터 익혀야 했으며 옆에서 보고 잘 배워야만 하였다.
아전들의 위치가 양반계층과 서민계층의 중간계층일 뿐만 아니라 두 계층의 문화에도 익숙해 있어서 이를 접목 연결하는데도 일조를 하여 왔고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판소리를 중흥시키고 탈춤과 광대놀이를 서민문화로 정착시켰으며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율풍류를 즐기고 <청구야담(靑丘野談)>이나 <연조귀감(椽曹龜鑑)>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등을 지어 이른바 여항문학(閭巷文學)을 일으켰다. (海東歌謠)를 편찬한 김수장(金壽長)은 서리(書吏)출신이요 (靑丘永言)의 편찬자 김천택(金天澤) 또한 포교출신의 이속이었으며 판소리 광대들을 돌보아주고 그 사설을 다듬어 정리한 고창의 신재효(申在孝)도 아전이었고 <연조귀감>을 쓴 이진흥(李震興)과 <이향견문록>의 저자 유재건(劉在建)도 역시 중인계층의 아전출신이었다.
부안 아전들이 남긴 아전문화의 자취는 어떠한가. 우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잊혀져가고 있는 이매창의 시집을 간행한 일은 큰 업적의 하나였다. 만일 그때 부안의 아전들이 매창의 시를 모아 출간하지 않았더라면 매창의 기류시문(妓流詩文)은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매창뜸의 그 묘 앞에 묘갈을 세웠으며 또 세월이 흘러 묘비의 자획이 마모되자 1917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개비를 하여 다시 세웠는데 이 부풍시사 사람들 또한 부안 아전들의 풍류시율을 즐기는 모임체였다고 하니 아전들을 부정적인 면에서만 보고 매도하는 것은 한쪽만 보는 편벽된 일이다.
아전들은 향찰(鄕札)이라는 이두문자(吏讀文字)와 구결(口訣:한문문장의 구절 사이에 붙이는 토) 문투의 계승자들이었으니 국어의 고어(古語) 연구에도 크게 공헌한 계층들이다. 궁중이나 관아의 하리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에는 그들만이 특이하게 읽거나 발음하는 말들이 많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대로 굳어진 것들이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고을 수령이 내린 판결문을 뎨김(題音)이라 하고 죄인의 공술서를 다짐(侤音)이라 하였으며. 속기록을 흘림(流音). 지주의 대리인을 마름(舍音). 요리사를 칼자(刀子). 문건의 목록을 발기(件記). 억울한 일을 관청에 나아가 호소하는 것을 발괄(白活). 씨앗 한 말 뿌릴 만한 넓이의 땅을 마지기(斗落地)라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탈춤이나 광대놀이 강릉 단오제도 아전들이 주도했고 조선조말 판소리의 등용문이었던 전주 대사습놀이는 전라도 감영의 아전들에 의하여 행하여진 서민문화의 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몰락한 1910년 이후 일제(日帝)의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아전들이 주도하여 오던 서민문화는 매우 빠르게 소멸되었거나 묻혀버렸다. 나라가 망하면서 그 지배구조가 무너지니 이들 대부분의 아전들이 일제의 지배구조 안으로 쉽게 흡수되면서 그 자리에 일본의 식민지문화가 빠른 속도로 정착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으로 양반문화에 끼어들 수 없었던 아전들의 열등의식은 가급적 자신들의 과거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거나 은폐하려 하였으며 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귀중한 기록들의 대부분도 이때에 파기 또는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따라서 아전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연구와 정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진한 것도 이 때문이니 우리 문화의 소중한 한 부분이 상실한 것이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형주 200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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