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과 다른 길에 선, 부안 대접주 김낙철

 

▲동학대접주 김낙철 선생 부부

김낙철(金洛喆 1858-1917)은 부안김씨이고 자는 여중(汝仲), 동학 도호는 용암(龍菴)이다.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에서 출생했다. 쟁갈마을은 안쟁가리, 용성리, 새멀, 송학동 등 네 개 뜸이 있는데 김낙철은 새멀에서 산 것으로 보인다. 김낙철은 체격이 크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700석 정도를 거두는 부자로 글을 읽는 선비였다.

동학에 입교하다

김낙철은 1890년에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교하였다. 동학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조선 사회가 당면한 어려움의 실상을 알 수 있었고 동학을 통해 극복 할 수 있다고 확신한 듯 하다. 교도가 증가함에 따라 교주 최시형이 순회 포교에 나서 1892년 7월에 부안 신리에서 수 백명의 도인을 모아놓고 교화시켰다.

순회포교 이후에 김낙철․낙봉 형제와 김영조 등이 최시형의 도움을 받아 지도자로 올라섰다. 1893년 2월 보은집회 때 김낙철은 도도집(都都執)의 책임을 지고 부안 사람들과 함께 참가하여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3월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에는 김낙철, 낙봉, 김영조 등 부안 교도 수백명이 참여했다.

1890년대 급격히 늘기 시작한 호남지방의 교인들을 당시 동학지도부가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없자 하층 간부들은 독자적인 행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최시형이 전라도 순시에서 ‘도를 아는 자는 적다’고 한 것은 호남 지도부가 교도들을 조직체계 내로 일사불란하게 흡수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교리해석이나 행동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경계한 것이다.

전봉준과 다른 길에 서다

1894년에 전봉준을 중심한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최시형이 비밀리에 분부하기를, 전봉준은 교인의 행위가 아니고 안으로는 사상이 다르다고 했다. 각 접에 내통하여 전봉준의 일에 동조하지 않도록 했다.

김낙철은 1894년 4월 1일에 수백명의 교도를 이끌고 송정리(현 행안면 역리 송정마을)의 신씨 재각에다 동학혁명군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동생 낙봉은 신소능과 더불어 줄포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도소 옆에는 부흥역이 있고 뒷산에는 역리산성이 있어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도소의 설치는 부안군수, 유림, 읍리들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전봉준의 봉기에 호응한 것이 아니라 농민군들이 부안을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김낙철은 무력을 이용한 급격한 사회 변혁 보다는 종교를 통한 점진적인 사회 변화를 택했다고 보아야겠다.

1894년 1차 동학농민 전쟁 봉기 때에 이들 형제는 민심수습과 안정에 힘썼으며 동학군의 민폐를 엄금했다. 한 때 전봉준과 손화중의 농민군이 부안현 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이철화를 결박하고 군기고와 전곡을 접수하기도 했다. 제주도민들이 부안 포구에서 양곡을 구입해서 뱃길로 돌아가던 때에 일부 동학군이 이를 빼앗으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김낙철은 급히 나가서 난군을 꾸짖어 무사히 가도록했다. 당시 제주도민은 김낙철의 조치로 아사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접과 북접을 얘기할 때, 전라도는 남접으로 충청도는 북접으로 구분하지만 지역으로만 나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도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의 연원에 따라 남․북접을 나눌 수 있다. 지역으로 부안은 납접에 가깝지만 김낙철은 북접의 김연국의 연원을 따랐고 부안의 지도자들은 북접에 연원을 갖는 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북접으로 분류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시형은 집강소 기간 동안에도 남접의 행동을 견제하고 호남과 영남의 북접계통 교도들에게 단속령을 내리고 도인을 가려내기 위한 교리문답을 실시하였다. 종교적 입장을 중시했던 북접과 혁명의 절실함을 내세웠던 남접 사이에는 이처럼 갈등의 요소가 컸다.

▲김낙철의 딸 내외, 사위는 학산 정갑수이다.ⓒ부안21

부안에서 기포한 김낙철

김낙철은 전봉준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가, 9월에야 최시형의 명을 받고 부안에서 기포(起包)하였다. 9월 기포의 부안 지도자는 대접주 김낙철, 기포장으로는 김석윤, 신명언, 강봉희, 신윤덕, 이준서, 신규석 등이다. 이외에 이름이 밝혀진 지도자들 38명이 더 있다. 2차 기포에 나선 농민군은 1894년 11월의 금구․원평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흩어졌다. 이후로 전라도 일대에서는 일본군․관군․민보군의 잔혹한 탄압이 전개되어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낙철 형제와 부안에서 체포된 32명의 농민군은 1894년 12월에 나주로 이감되었다. 이들 중 27명은 일본군의 즉결재판으로 모두 총살당했다. 김낙철이 나주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주도민 백여 명이 나주진영에 몰려가, 흉년에 김낙철이 제주도민 양곡선을 구해준 사실과 구명을 애원함으로 나주 처형은 면하고 서울로 이송되었다.

서울에서 동학관련판결 선고서에 따르면, 김낙철이 동학당에 들어간 것은 확실한데 범죄한 증빙이 확실치 않아 무죄로 풀어준다고 했다. 이것은 1,2차 봉기 때 김낙철이 무력적인 기포에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서울에서 풀려나서 고향으로 왔을 때 일반 백성들은 환영일색이었다. 농민전쟁 기간 동안에 도소를 잘 지휘하여 민폐를 막고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에서는 대접주 김낙철을 다시 잡아들여 부안 동학의 포․접의 뿌리를 자르려하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갑오군공록」에 따르면 부안의 유학(幼學) 이현기는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와서 동학군을 체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유림 유정문과 최봉수 때문에 죄 없는 교인 20 여명이 죽임당하고 가족들의 고초도 컸다. 쟁가리 출신 최정현은 농민군에 참여했다가 고향을 떠난 후에 고향에 돌아 올 수 없었다. 전라남도 화순에 숨어살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들은 유골을 수습하여 기차에 싣고 와서 마을 주변에 묘소를 마련했다.

▲상서면 감교리의 호암수도원 ⓒ부안21

동학조직 재건에 나서다

김낙철은 북접교단의 인물이면서도 사회변혁운동의 가능성을 지켜보았다. 이러한 태도가 변혁운동에 참여하려는 남접의 남은 세력을 이해하고 접맥할 수 있었다. 김낙철은 북접교단과 연결을 가지면서 향촌사회가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전라도 지방에서 동학조직의 재건에 앞장섰다. 1896년부터 부안과 최시형의 거처를 오가며 교단을 재건하기 위해 활동하였는데 당시에 연결되는 지역은 함평․부안․태인․김제․고부 등이었다.

최시형이 처형되자 많은 교인들이 낙심하여 동학을 떠났다. 1900년(광무 4)에 손병희가 천도교의 종통(宗統)을 재확인하려고 하자 김연국과 김낙철은 그에 반기를 들고 나가 시천교를 창시하였다. 다시 천도교로 돌아온 김낙철은 성도사(小師)가 되어 포교에 전념하였다. 충청도 보은지방에서 정양하다가 두 번에 걸친 감옥생활에서 얻은 고문 후유증으로 1917년에 사망하였다.

김낙철이 동학 활동으로 가정을 돌볼 수 없자, 그의 가족들은 흩어져 숨어 살았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과 김낙철의 이름조차 입술에 올리기 힘든 어두운 시절을 보냈다. 부유했던 터전을 잃어버리고 그의 재산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김낙철 때문에 부안김씨 재실 취성재가 타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동학이 처한 어려움만큼이나 그의 이름은 집안에서나 지역에서나 잊고 싶은 이름이었다.

정갑수(丁甲秀)는 김낙철의 사위로 장인이 죽은 뒤 호남지방의 교인들을 순방 하면서 포덕과 교화에 힘썼다. 손병희에게 여러 차례 거사자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하였고, 3․1운동 후에는 유격대 조직과 세력확장 준비 중에 조직원들의 대거 구속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전라도 포덕에 힘써 한때 교구수가 2,000여 호에 이르렀다.

상서면 감교리의 호암수도원에는 부안교구가 있으며 일요일에는 정갑수에 연원을 둔 사람들이 모여서 시일을 지낸다. 이들 중에는 최시형이 부안을 바라보며 말 했다는 ‘화개어 부안(花開於扶安) 결실어 부안(結實於扶安)’을 기억하는 정갑수의 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기초가 있다.


/정재철
200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