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대(神仙台) 옛터

 

청학동으로 간 신선대 사람들

6.25전쟁 후, 변산의 신선대에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어 18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좆아 사서삼경을 읽고, 상투, 댕기머리에 흰옷을 고집하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으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그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바로 그 곳이다. 1996년 경까지만 해도 추석 때 신선대로 성묘 오는 그들(은재필 씨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묘를 모두 이장해 가 내왕이 끊겼다. 위의 사진은 그 당시 신선대 마을 입구와, 마을 서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뿌리깊은나무”에서 퍼왔다. 사진/김수익[부안21 편집부]

월명암(月明庵) 뒷등 낙조대에서 西海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분초대, 망포대를 지나 북재를 넘으면 신선대(神仙台 486m) 루대(樓台)에 서게 된다.

신선들이 살아서 신선대라 하였는지…, 어쨋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두건에 도포차림으로 세상과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기들의 방식에 의하여 구름을 벗하고 유수를 지근한 채 공․맹자의 도심(道心)이 인간 도리의 최선의 길임을 주장하며 신선처럼 살다가 무지한 속인들의 이념분쟁으로 북에서 보낸 김 신조(청와대 습격) 일당의 민간 학살사건(이용복)이 비화되어 오지인들의 보호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이곳 사람들도 영문을 모른 채 자기들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이 정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경상도 청학동 또는 타지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

1977년도 경에 보안면 柳川初等學校에 근무할 당시 이곳 도인(道人)들과 가끔 교류가 있었고 서로 오고 간 정이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곳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가끔 이곳에 들려 한바퀴 옛터를 돌아보고 회상에 젖어 본다.

神仙臺 옛터

동남쪽 월태화용(月態花容)
기령(氣靈)이 운집(雲集)한 터
산수진경(山水眞景) 무릉도원(武陵桃源)
높은 터에 세워놓고

흐린 세상 취한 인간
바른 도법(道法) 깨우치려
흰 두건 도포 자락
신선(神仙)처럼 살았는데

무단한 정치(政治) 논리
백성(白姓) 보호 미명 하에
굴원이 내 몰리듯
당신들도 추방(追放)을 당했지요

초립동(草笠童) 글 읽던 도량(道場)엔
벽오동 만 쓸쓸하고
홰나무 우거진 집터
옛날 자취 완연하니

그 옛날 지인(知人)생각
왠지 마음 허전하여
산새 우는 옛 터에
아쉬운 정(情) 남겨 둔 채

반야월(半夜月) 외기러기
울며 북재(敲峙) 넘어 가듯
흐르는 계곡 따라…
해명 태명 내려왔소.

•월태화용(月態花容) -달 모양 꽃 모양의 집터
•무릉도원(武陵桃源)-도연명(陶淵明)이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기술된 선경(仙境) 무릉의 어부가 발견 하였다는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초립동(草笠童) – 풀로 만든 갓을 쓴 젊은 사내


/신선대에서 邊山 小松 金吉重
2005·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