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뱃굿판의 참광대 고 이창영선생

 

▲위도띠뱃놀이 원당오르기/자료사진ⓒ부안21

구성진 태평소 가락으로 풍어제의 흥과 신명을 이끌어…

많이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위도면 대리 마을에 전해 오는 일종의 풍어제인 마을동제가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정해진 것은 1985년 2월 1일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된 위도띠뱃놀이가 강원도 춘천시에서 열린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은 것은 1978년이었으니, 대통령상 수상 이후 근 7년 만에 국가의 중요 무형문화재로 정해진 것이다.

위도띠뱃놀이가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되기까지 여러 마을 주민의 노력과 외지 민속학자들의 노고도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이 마을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띠뱃놀이 보존과 전승문제를 바라보는 일부 마을주민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주된 이유는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에 마을로 들어 온 물질적 수혜 등이 마을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띠뱃놀이는 대리마을 주민들이 적어도 수백 년 동안 함께 힘을 모으고 정성을 모아 큰 사심 없이 치러 온 마을 공동의 풍어제였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는, 정월 초순 대리마을에서 펼쳐지던 띠뱃놀이에 대리마을을 포함한 위도 주민, 부안군민, 전라남북도민, 저 멀리 충청도민과 황해도민까지 참가했다는 사실을 현존하는 고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그 옛날 위도띠뱃놀이는 대리마을의 앞바다인 칠산어장을 오고가던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많은 어부들이 함께 올리던 큰 제사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 위도띠뱃놀이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뒤로 규모는 점점 축소되고, 절차는 대폭 간소화 되었으며, 제사를 올리는 마을주민들의 순수성과 진정성은 조금씩 퇴색 되고 말았다.

띠뱃놀이가 전국에 그 명성을 떨치고, 국가 차원의 관리와 보존에 들어갈 무렵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서 급격한 변혁기였기에 대리마을 주민들의 의식도 당연히 급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칠산바다를 지키고 마을을 수호하는 여러 신들께 전적으로 풍어와 평안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선조들에 비해 문명이 바뀐 시대를 살게 된 현대의 대리마을 주민들에겐 띠뱃놀이가 그저 일상적인 풍습의 하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원인들 때문에 그 가치와 의미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위도띠뱃놀이가 더욱 위축된 데는 70년대 후반쯤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된 마을교회의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통령상 수상 이후, 띠뱃놀이 보존과 관리 문제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는, 정월 초순 대리마을에서 펼쳐지던 띠뱃놀이에 대리마을을 포함한 위도 주민, 부안군민, 전라남북도민, 저 멀리 충청도민과 황해도민까지 참가했다는 사실을 현존하는 고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그 옛날 위도띠뱃놀이는 대리마을의 앞바다인 칠산어장을 오고가던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많은 어부들이 함께 올리던 큰 제사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부안21

정월 초사흘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쭈욱 이어지던 띠뱃놀이는 언제부턴가 축소되었고, 마을 주민들의 대동단결의 축제이자, 성스런 연례의식이었던 이 마을굿이 어느 때부턴가는 외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쇼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그 기점은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1978년 전후라고 여겨진다.

대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준비과정에서 띠뱃놀이의 본질은 많이 훼손 되었고, 대통령상 수상 이후, 언론사의 스폿라이트를 받게 되면서 다시 또 띠뱃놀이의 정체성은 많이 상실되었다.

그런데다 띠뱃놀이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전과 중요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물질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소외 받았다고 생각하는 마을주민들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면서 정초가 되면 띠뱃놀이를 치르기 위해 똘똘 뭉쳤던 마을주민들의 결집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쁜 일손을 뒤로들 미루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서 신명을 다 바쳐 공연을 했던 주민들 중에는 대통령상을 수상해 받게 된 상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지 못하는 주민도 있었고, 띠뱃놀이의 유명세에 편승해 개인의 물질적, 신분적 잇속을 쫓는 일부 마을주민들과 그런 잇속에서 소외된 일부 마을주민들 사이의 위화감은 서서히 조성 되었다.

그런 사정은 띠뱃놀이가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전수관과 전시관이 건립되고, 대를 이어 인간문화재 등이 지정되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살이는 늘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우문을 던진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띠뱃놀이 보존과 관리 문제에 대한 안타까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위도띠뱃놀이를 제대로 전승시키기 위해 인간문화재로 지정한 분은 네 분이다.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이복동 옹과 조금례 여사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됐고, 두 분이 타계하신 뒤엔 김상원 씨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됐고, 지난 7월엔 이종순 씨가 인정됐다.

오래전에 타계하신 두 분의 인간문화재와 현재 생존해 계신 두 분 인간문화재의 기능과 예능을 평가해 보겠다고 어줍잖은 잣대를 들이대서는 결코 안 될 일이지만, 결코 이분들에 뒤지지 않을 위도띠뱃놀이의 참광대로 고 이창영선생을 꼽는다고해서 누군들 함부로 시비를 걸기는 힘들 것이다. 매년 정월이면 그 힘차고 구성진 태평소 가락으로 마을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해묵은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 뒷산과 앞바다에서 깊은 겨울잠을 자고 있을 혼령들을 깨워 희망의 새해가 밝았음을 알리고, 한해의 풍어와 평안을 기원하며 어우러지는 띠뱃굿판의 흥과 신명을 이끌던 고 이창영선생을 오늘도 그리워하는 것은 비단 그분의 유가족만이 아닐 것이다.


/서주원
2007·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