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관아(官衙)와 공해(公廨)

 

▲부안 관아의 내삼문 앞에 2층으로 된 진석루(鎭石樓)를 세워 관아의 위용을 갖추고 그 앞에는 너럭바위가 깔려 있으며 주림(珠林), 옥천(玉泉), 봉래동천(蓬萊洞天)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봉래동천이라 새긴 초서의 글씨는 1810년에서 1813년까지 부안 현감을 지낸 박시수(朴蓍壽)가 쓴 글씨로 명필이다. 그런데 1999년에 부안군청에서 이 옛 관아 앞의 묻혀버린 주림옥천, 봉래동천 이대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발굴 복원하고 <扶安西林公園內金石文調査報告書>까지 내더니 2002년 초 현재 이들 귀중한 유적들은 다시 묻히어버리고 그곳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사진은 2003~2004년 부안 핵폐기장사태 때 경찰병력이 그 주차장을 이용하고 있다.ⓒ부안21

수령의 집무소 관아

앞에서 조선시대 부안의 행정치소인 읍성(邑城)에 대하여 그 형태와 규모, 위치 그리고 세 곳의 성문의 문루와 그에 관한 명사(名士)들의 시문(詩文)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았거니와 이와 같은 행정치소의 공간 안에는 고을의 수령이 정사를 보는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공해(公廨) 들은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고을행정이 펴져 왔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관아(官衙)와 공해(公廨)라 함은 관공서와 그에 따른 건물을 총칭하는 말이며, 고을의 수령을 비롯한 육방(六房) 관속들인 아전들이 집무하는 건물이란 뜻으로 관사(館舍)라 하기도 하고 이속(吏屬)들이 모여 고을의 일을 처리하는 곳이란 뜻으로 순수한 우리말로는 ꡔ마을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위상의 중심은 동헌과 객사. 그리고 향청이었다.

모든 고을의 읍성은 관아(마을)를 중심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호벽적인 성격의 시설물이 곧 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안의 관아와 공해는 지금의 군청 청사를 중심으로 그 전후좌우에 집중되어 있었다.

관아는 고을의 수령인 현감이나 군수, 부사 목사 등이 공무를 집행하는 건물을 말하는데 정청(政廳). 아사(衙舍). 또는 동헌(東軒)이라고도 하며 관아와 공해 중 으뜸 건물이며 오늘날의 군청이나 시청 등의 청사에 해당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수령(守令)이 행하는 권한은 막강하여 행정과 사법을 총괄 처리하며 아전이라 불리는 육방의 관속들을 부려 고을을 다스리는 치정의 총본부라 할 수 있다.

옛날 부안 현감이 집무했던 아사(衙舍)의 자리는 지금의 부안군청 뒤 중앙교회가 있는 곳 일대였으며, 성황산을 등 뒤로 하고 부안읍내를 굽어 내려다보는 앞이 시원하게 확 트인 배산임수형의 요지였다. 동헌의 옥호는 패훈당(佩訓堂)이라 하였다. 신라 말경 중국으로부터 풍수사상이 들어온 이래 음택은 물론이요 궁궐과 고을의 치소(治所)는 물론이요 사찰의 대웅전 등이 들어서는 터는 최고의 명당자리를 잡아 자리하였다고 한다.

동헌의 옆 서쪽으로 옛 통일교회 자리에 현감의 사택격인 내아(內衙)가 있었는데 이 내아의 자리에 일제 때 왜놈들이 그들 황실의 조상신과 이른바 신대시대(神代時代)의 신을 섬기는 사당인 신사(神社)를 지어 놓고 우리에게도 참배를 강요하였으니,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치욕의 역사현장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몇 백 년 된 은행나무 두세 그루가 고목되어 남아 있다.

그리고 동헌과 내아의 사이에는 공적인 직책은 아니지만 현감의 사사로운 비서격인 책실(冊室)이 거처하는 건물이 있었다. 책실은 책방(冊房)이라고도 하는데 현감이 사사로이 채용한 일종의 개인 참모다. 관아의 내삼문 앞에 2층으로 된 진석루(鎭石樓)를 세워 관아의 위용을 갖추고 그 앞에는 너럭바위가 깔려 있으며 주림(珠林), 옥천(玉泉), 봉래동천(蓬萊洞天)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봉래동천이라 새긴 초서의 글씨는 1810년에서 1813년까지 부안 현감을 지낸 박시수(朴蓍壽)가 쓴 글씨로 명필이다.

그런데 1999년에 부안군청에서 이 옛 관아 앞의 묻혀버린 주림옥천 이대를 유적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발굴 복원하고 <扶安西林公園內金石文調査報告書>까지 내더니 2002년 초 현재 이들 귀중한 유적들은 다시 묻히어버리고 그곳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의 유물유적이 자동차 주차장만도 못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불상하지 않은가.

향리(鄕吏)들의 집무소 공해(公廨)

동헌 패훈당의 앞에는 외삼문(外三門)인 진석루(鎭石樓)라는 다락이 있어 관아로서의 위용을 잘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문거리의 바로 아래로는 아전(衙前)들이 근무했던 질청(作廳), 현사청(縣司廳), 형방청(刑房廳), 통인청(通引廳), 장방청(長房廳), 관주청(官廚廳), 좌수(座首)와 별감들의 집무소인 향청(鄕廳)과 그 앞으로는 객사(客舍). 그리고 난후청(攔後廳) 등이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니, 옛날 부안을 다스린 행정의 중심지는 성황산의 밑 속칭 돌팍거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관아에 딸린 공해(公廨)의 건물들이 있었던 위치와 그 기능을 살펴보기로 한다.

질청(作廳)질청의 우두머리는 이방이다. 작청을 흔히 질청이라고 하며 지금의 군청 서편 옆 옛 경찰서가 있었던 곳에 있었는데 육방 관속이라는 이른바 아전(衙前)들의 우두머리격인 삼공형(三公兄 ) 중의 하나인 이방(吏房)과 예방(禮房), 집사 등의 집무소다. 삼공형은 이방. 호방. 형방을 지칭하는 말인데 아전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이른 의미가 있다.

호장청(戶長廳)현사청(縣司廳)이라고도 하였으며 질청의 앞에 있었는데 왜정 때는 이곳에 우편소가 있었다. 호장(戶長)이 집무하는 곳이라서 호장청이라 하였다. 호장은 현감을 도와 업무를 집행하는 향리(鄕吏) 즉 아전의 원로격 이었다. 호장은 관아의 살림을 총괄하며 관노비와 기생들을 관리하였으며 아전들이 선출하였는데 전통적으로 호장을 배출한 집안에서 뽑았다고 한다. 아전이라는 말은 고을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인 아사(衙舍)의 앞에 있는 집무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육방관속의 이배(吏輩)들을 총칭하는 말이며 그 신분은 중인계층에 속했다.

형방청(刑房廳)형방청은 내아(內衙)의 앞, 질청의 뒷편에 있었으므로 구 교육청 뒤족에 있었다. 죄인을 다스리는 형전(刑典)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기관이었으니, 오늘날의 경찰서와 같았으나 그 권한은 훨씬 강하였다. 따라서 형방 또한 삼공형의 한사람이었다.

․장청(將廳)장청은 군관청 이라고도 하는데 군관(軍官)의 우두머리인 수교(首校)의 근무처로 동헌의 옆 동편에 있었으니, 지금의 노휴재(老休齋) 뒤쪽에 있었다. 장청에는 수교가 1인, 병교(兵校)가 2인, 장교(將校)가 5인이었으며, 파총(把摠) 1인, 초관(哨官) 2인이 있었다. 조선조 말경 부안현 군인의 수는 임진왜란 이후 15세 이상의 지방양인과 양반의 자제들로 조직하었다는 속오군(束伍軍)의 정원이 600명이고 정병(正兵). 어영군(御營軍). 포병(砲兵). 기병(騎兵)의 보인(保人) 수가 4,028명이었다고 하나 실지로는 정원을 확보하고 있지 않았다.

통인청(通引廳)통인청은 질청의 앞에 있었는데 통인이란 지방 관장에 속한 요즈음의 사환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지인(知印)이라고도 하였으며 주로 관아에서 관장의 잔심부름을 하였으며 대개 10여 세의 어린아이 때부터 관아의 일을 익혀 장성하면 아전이 되었다. 사또의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위세나 횡포 또한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방청(長房廳)사령(使令)들의 집무소다. 동헌의 앞에 있었으니 군청의 동편 노휴재(老休齋) 옆에 있였으며, 죄인을 가두는 감옥과 함께 있었다. 옛날 이곳의 골목이 몹시 좁아서 감옥앞의 거리를 일러 한뼘거리라 했다고 한다.

관주청(官廚廳)현감의 음식, 의복 등을 마련하여 조달하는 기관인데 동헌의 동쪽 장청 옆에 있었으므로 지금의 돌팍거리 옆에 있었다.

향청(鄕廳)향청은 고을 수령의 근무처인 아사(衙舍)와 임금을 상징하는 객사(객사)와 더불어 고을의 삼대 기관의 하나였다. 향청은 유향소(留鄕所) 또는 향사당(鄕射堂) 향소(鄕所)라고도 하는데 좌수(座首), 별감(別監)의 집무소다. 관주청의 옆 노휴재의 뒤에 있었다. 그 임원은 향안(鄕案)에 이름이 올라있는 고을의 양반들 중에서 선임되었다. 고을 수령의 자문기관으로 현감, 군수 등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며, 아전들의 부정이나 횡포를 규찰하는 등의 일을 하였으며 민정의 대표기관이기도하고 지방자치기관의 기능도 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후기에 들어 아전들과 한통속이 되어 온갖 부정과 작폐가 심하였던 곳이기도 하였다.

난후청(攔後廳)오늘날의 향토예비군과 비슷한 성격의 군인들 집합소다. 객사 앞에 있었으며 별군의 장교인 별장(別將) 1인, 아전의 일종인 색리(色吏) 1인, 군병(軍兵) 백 명이 정원이었으나 항시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객사(客舍)객사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부안군청 자리다. 객사의 이름은 부풍관(扶風館)인데 부풍(扶風)이란 옛부터 불러온 부안의 고호(古號)며 별호다. 객사는 동헌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어서 어느 고을이나 관아와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객사의 주관(主館) 정청에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시고 현감이나 군수가 새로 부임 또는 이임할 때 그 앞에서 이취임식을 거행하며,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궁궐을 향하여 망배(望拜)를 하였으며 중앙관서에서 파견된 관리 등이 머물던 곳으로 궁궐에서 임금을 모시고 정사를 보듯이 지방에 있지만 항시 임금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린다는 자세와 성심을 다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며 임금의 생사당(生祠堂)인 셈이다.

전패(殿牌)는 전(殿)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로 임금을 상징하였고 궐패는 궐(闕)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로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상징하였다 지붕위에는 용마름을 얹지 않았으며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의 양 날개에 각기 방이 설치되어 있어 공무로 출장 나온 관리나 여행중인 양반들이 유숙하기도 하는 곳이다.

부안의 객사는 1926년에 훼철되고 그 자리에 부안군청이 들어섰지만 전주 객사나 이웃 고을 고창의 흥덕. 무장. 김제. 순창 등의 객사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볼 때 아쉽고 부끄럽다.

/김형주 2005·07·12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