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의 전문가 향리(鄕吏) 이야기 [1]

 

향리의 뿌리는 지방의 호족(豪族)이었다

향리란 지방의 행정기구인 관아에 딸린 하급 관리인 구슬아치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 아전들은 고을의 수령인 감영(監營)이나 부목군현(府牧郡縣). 진영(鎭營). 역원(驛院)의 수령의 명을 받아 행정을 수행하는 최 일선의 행정 전문가요 오늘날의 지방공무원들이었다.

▲상소산도, 아래에 관아로 보이는 건물들이 들어 서 있다./자료제공 김형주

아전을 크게 나누면 임금이 정사를 펴는 중앙의 각 관서에 딸린 경아전(京衙前)과 지방관청에 딸린 외아전(外衙前)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아전이라 하면 외아전인 향리(鄕吏)를 이르는 말로 쓰고 있다. 이들의 집무소가 고을 수령의 정청(政廳)인 관아 즉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지근지처인 그 앞에 있다고 하여 아전이라 호칭 한다. 그 외에도 서리(胥吏). 또는 이속(吏屬). 이배(吏輩)라고도 한다. 그들이 관아에서 담당하여 처리하는 주된 업무는 문서(文書)의 처리와 전곡(錢穀. 稅穀)의 처리다.

그들의 신분적인 위격은 중인계급에 속하였다. 그리고 채용시험을 거쳐서 선발하는 직종이 아니고 세습직(世襲職)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분적인 계층상승을 위하여 과거도 볼 수 없게 제한을 받았었을 뿐 아니라 법적 제도적으로 일정한 급료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민들 보다는 잘 살아갔으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도 향유하고 이른바 여항문학(閭巷文學)을 형성하여 이끌어갔다.

외아전인 지방의 이속들에 비하여 중앙의 기관에 딸린 경아전에는 녹사(綠事). 서리(書吏). 조예(早隸). 나장(羅將). 차비군(差備軍) 등의 직급이 있었으며 녹사는 종6품까지 승진할 수 있고 서리는 종7품까지도 승진할 수 있었으나 지방의 아전들은 육방관속(六房官屬)이라 하여 이방(吏房). 호방(戶房). 형방(刑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공방(工房)의 직분이 있을 뿐이어서 잘하면 그 우두머리격인 삼공형(三公兄: 이방. 호방. 형방)까지 오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고을의 향리인 육방의 아전제도가 확립된 것은 조선조에 들어서인 듯 하다. 그러나 그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에 지방의 자치기구인 사(司)를 담당하여 왔던 지방의 호족(豪族)들이 그 연원(淵源)이었던 것 같다.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점차 강화됨에 따라 호족들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그 위상도 점차 격하되어 이속화(吏屬化)한 것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아전의 우두머리인 호장은 신라시대 육부(六部)의 촌장(村長. 村主)이였으며 고려 초에는 당대등(堂大等)이라 하였고 성종(成宗)때부터 호장(戶長)이라 고처 불러 왔었는데 조선조 초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 지방의 호족들의 세력을 더욱 꺾어버리기 위하여 향리(鄕吏)로 흡수시켰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근거는 고려 현종(顯宗) 때인 11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전국의 군현(郡縣) 500여 곳 중 중앙정부가 수령을 배치한 곳은 대읍(大邑)을 중심으로 불과 140여 곳에 그쳤다고 하니 나머지 360여 작은 고을(小邑)은 지방의 호족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다스렸음에서 알 수 있다. 실지로 지방의 사정을 꿰뚫고 있는 호족들의 협조 없이 지방행정을 펴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지방 호족은 자연스럽게 향리인 아전으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리들의 부패와 부안의 민란(民亂)

조선조 중기 이후 양반정치의 부패와 함께 그 한 축을 거들어 온 집단이 경향을 막론하고 이속집단인 아전들이었다. 고을의 수령과 양반 토호(土豪)들의 온갖 부정과 농간은 아전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고을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 뿐 아니라 부정의 수법은 물론이요 그 처리 방법까지 잘 아는 노회한 아전들이 어찌 보면 주동자였고 책상물림인 수령은 동조자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와 폐해는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8년에 이미 <무진봉사(戊辰封事)>의 상소문을 올려 아전들에 대한 폐단을 우려하였고 중봉(重峰) 조헌(趙憲).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이민서(李敏叙). 이수광(李晬光). 유형원(柳馨遠) 등이 수령들과 아전들의 부패상과 그 연결고리의 심각상을 지적한 바 있으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명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삼정(三政)의 문란 중심에 아전들이 있음과 그 부패사례들을 조목조목 들고 있다.

부패의 핵심은 이른바 <삼정(三政:田政.還穀.軍布)의 문란>이었다. 토지에 부과되는 세곡이나.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봄에 양곡을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서 가을에 걷어 들이는 환자(還穀.) 그리고 정병(正兵)을 돕는 조정(助丁)의 역을 면제받는 대가로 바치는 면포(綿布)의 제도가 삼정인데 어느 것이나 모두 돈. 즉 세금이었다. 이것을 부과하고 걷어 들이는 일을 고을 수령의 명에 의하여 아전들이 집행하는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부정과 간계를 다하여 수탈하였음으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서 자살하고 도망하고 도적이 되고 급기야는 민란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정도가 극심하여지자 순박한 백성들이 마침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민란이었다. 민란의 처음 시작은 1811년 평안도 가산(嘉山)에서 홍경래(洪景來)가 일으킨 가산란(嘉山亂)이었지만 이는 서북(西北) 사람들의 차별대우에 대한 항전의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볼 때 삼정에 대한 민란의 시초는 1862년의 진주민란(晋州民亂)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정의 문란에 저항하는 민란은 주로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많이 일어났는데 전라도지방의 경우 제주. 순천. 장흥. 함평. 익산. 부안. 금구. 고산 등지의 민란이 특히 격렬하였다. 부안민란의 경우를 들어보면 이때에 조정에서 전라도지방의 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선무사(宣撫使 :백성들을 무마하는 임금의 특사)를 급파하였는데 그 선무사 일행이 부안을 거쳐 고부(古阜)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부안의 군중 2000여 명이 선무사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고 부안의 수령과 아전 등이 백성들을 착취한 사항을 조목조목 들어 문안(文案)으로 제출하고 이는 모두 아전 김진설(金晋說)의 농간과 악행에 의한 것이니 그를 죽이기 전에는 길을 비키지 않겠다며 김진설을 잡아다 선무사 앞에서 타살하고 그 집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부안고을 아전들의 부패와 횡포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들은 밝혀진 기록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다산(茶山)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지적한 사례들에 못지않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부안고을이 당시로는 살기가 좋은 고장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민란이 일어나면 언제나 성난 민중의 첫 번째 표적은 아전들이었다. 그들이 일차적으로 공격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무보수에 세습직이며 그 자리에만 붙박이로 있어왔고 실지로 삼정의 농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일선에서 갖은 패악한 짓을 다하여온 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오동학란이 일어나자 누구보다도 혹독한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바로 이들 아전들이었다. 그래서 경상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아전들과 지방의 양반 토호들이 합세하여 대항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맞아 싸운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부안의 어느 아전집안은 비밀리에 가족들을 이끌고 밤에 대벌리에서 배를 타고 황망히 도망하여 미처 합류하지 못한 가족을 모항(茅項)에서 태우고 제주도로 피란을 하였으며 그곳에다 집도 사고 농토까지 마련한 자세한 기록이 <갑오구월제행일기(甲午九月濟行日記)>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김형주 2005·07·19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