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이름 없는 혁명가의 길

 

▲딸 김용화 할머니가 12일, 아버지 지운 김철수 선생 묘소를 찾았다.ⓒ부안21

 

부안 출신 가운데 김철수라는 이름이 있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좌우합작으로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고 1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를 만큼 치열한 독립투쟁을 펼쳤다.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음에도 1986년 죽을 때까지 공안당국의 1급 감시 대상이었다.

국가보훈처는 2005년 8월 3일 독립운동가 김철수와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 주인공 김산을 비롯한 좌파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을 8.15 60주년에 서훈을 추서한다고 밝혔다.

김철수의 딸인 돈지의 용화 할머니께 전화 했더니, 선생이 원했던 조국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 평가였다면 하는 아쉬움과 나라를 찾기 위해 몸을 내 놓은 독립운동가를 등급으로 나누어 서훈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말씀도 하셨다.

▲12일, 지운 선생이 살던 토담집을 둘러보는 딸 용화 할머니ⓒ부안21
▲낙향한 지운 선생은 손수 토담집을 지어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의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부안21

 

민족에게 진정한 해방을

김철수(金錣洙(1893∼1986))는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동진강 수로가 닿는 곳으로 아버지는 쌀 위탁 판매업을 하는 넉넉한 소지주였고 재주가 있는 아들의 교육에 열성이었다.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 군수를 지냈던 서택환이 서당을 열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서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우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서택환은 “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김철수는 서택환의 영향으로 사람 노릇을 한다고 자주 얘기했다.

일본의 와세다대학 유학시절은 유학생들과 더불어 『학지광』을 만든 일이 눈에 띈다. 이 잡지를 통해 유학생들의 상호 친목은 물론 국제정세, 국내 상황의 변화 및 세계사조의 변화 등을 함께 고민해 나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첫 비밀 결사인「열지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고, 두 번째 결사는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중국, 조선, 대만의 동지들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귀국 후 1920년에는 「사회혁명당」을 조직했고, 이동휘 세력과 조직적 결합을 하여 「고려공산당」을 1921년에 창립하여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외 운동가들의 희망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표방하여서 무장투쟁론자들의 세력을 포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철수는 국내 개조파 대표로 이 회의에 참여했으나 각 조직의 의견 대립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24년 귀국한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역임한다.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구속을 피하고, 하반기에는 책임비서가 되어 당 조직을 이끌었다. 1930년에 검거되어 출소한 후 1940년에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예방구금 되었다.

▲지운 김철수의 유학시절. 앞줄 왼쪽부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뒷줄 왼쪽부터 김명식, 김양수, 이병도, 김종필, 한상윤, 고지명, 이현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재평가

해방 이틀 후에 공주 감옥소에서 출옥한 김철수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정당통일을 목적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한다. 공산당대표로 김철수가 참여하여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을 자임하지만 좌우익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만다.

김철수는 사회노동당 창당에 나선다. 아울러 김규식을 지도자로 염두에 두고 지속적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창당 후 이탈자가 발생하고 당이 해체되자 ‘정치인 김철수는 죽었다’는 심정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철수는 손수 지은 토담집을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의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그는 남북의 통일을 염원하며,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듯 외롭고 힘든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적 감화와 기억을 남겼다. 그의 독립운동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활동으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사회주의자 정도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번 조국해방 60돌에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함으로써 우파 독립운동가의 활동만 배워온 우리들에게 비로소 두 눈으로 독립운동사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철수는 자신의 한 일을 자랑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이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며 역사의 대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조국이 어려울 때 중국과 러시아와 한국을 넘나들며 풍찬노숙 하다가 어느 후미진 산골에 묻혀 조국의 나무에 자양분이 된 이름 없는 혁명가이기를 바랐다.


/정재철
2005·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