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 김철수 선생 19주기

▲지운 김철수

김철수를 다시 생각한다

지운(遲耘)김철수(金錣洙 1893-1986)는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아버지 김영구와 어머니 신안 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지주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재산이 있었고 원천리의 수로를 이용하여 쌀 위탁 판매업도하는 넉넉한 가정이었다.

독립운동에 몸을 내어놓다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 군수를 지내다 군수직을 사직한 서택환이 서당을 열고 있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서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우고 민족의식에 눈 뜨게된다. 서택환은, “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일본유학시기에 사회주의에 접하고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택했다.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열지동맹」「신아동맹단」을 조직하고 귀국해서는 최팔용․최혁․장덕수 등과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이동휘와 관계를 가지면서 고려공산당의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다.

▲지운 김철수의 유학시절. 앞줄 왼쪽부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남길두, 장덕수, 김철수, 윤홍섭, 최익준, 정상형, 양원모,중간 줄 왼쪽부터 김영수, 춘원 이광수, 김성녀, 송계백, 백남훈, 서상호, 노준영, 신익희 뒷줄 왼쪽부터 김명식, 김양수, 이병도, 김종필, 한상윤, 고지명, 이현규ⓒ부안21

6․10만세 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이 와해되자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를 맡았다. 일본의 검거 회오리 속에서 1926년 12월에는 당대회를 개최하여 당을 복원하고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1930년에 체포되어 잠시 출소한 때를 제외하고는 해방되는 때까지 감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어려움을 감수했다.

해방 후에 김철수는 모든 파당은 통일되어야한다는 입장에서 소수의 자발적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민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주장과 신념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계열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김철수가 관여한 사노당은 1946년 10월 16일 창당 후 이탈자가 속속 발생하고 11월 16일 북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비판하는 결정서를 받게 되자 와해되기 시작했다. 지운은 1947년 2월 27일 사로당이 해체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했다. 이때부터 ‘자연인 김철수는 살고 정치인 김철수는 죽었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지운이 살았던 백산면 대수리 토담집, 지운이 강릉 오죽헌에서 캐다 심었다는 오죽이 무성하게 자라있다.ⓒ부안21

통일에 대한 꿈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지운의 화두는 통일이었다. 1996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보았고 그 날이 오기를 고집하며 백살하고 네 해를 더 살겠다는 고집은 통일되는 그날을 보기 위해서였다.

▲백산면 대수리 토담집, 지운이 거처하던 방ⓒ부안21

60년대 중반에는 선산이 있는 백산면 대수리로 손수 토담집을 지어 거처를 옮겨 살았다. 분단된 한국에서 작은 고통이라도 분담한다는 자세로 초라하고 고독한 생활을 시작했다. 집 앞에 자그마한 화단을 가꾸고 유난히 꽃과 나무와 자연을 사랑하여 잘 키운 꽃들을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고 여러 차례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을 등산했다. 그렇지만 지운이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사회주의를 택했던 까닭에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라 잃었던 식민지 시대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상 전위에 서서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며 죽음을 무릅쓰고 힘쓰던 독립운동가에게 분단된 조국에는 작은 토담집과 겨울의 칼바람과 공안 당국의 감시가 있을 뿐이었다.

▲지운이 을릉도에 갔을 때 만고풍상을 겪으며 절벽 위 외롭게 서있는 향나무를 보고 쓰신 글ⓒ부안21

식민지 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고 친일 했던 사람들이 다시 득세하는 이곳에는 진정한 해방이 찾아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위사람들에게 얘기 할 때는 “내가 어디 공산주의 했간디, 모다 나라를 위해서 한 것이지”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들을 써서 선사하기를 즐겨했는데, 이 글 중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士當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微斯人誰與歸

▲한겨레신문 보도(1989.11.24)ⓒ부안21

이 글귀를 쓰면서 선비의 자세는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대우를 받은 뒤에 선비가 받아야한다고 그 의미를 해석했다.

▲지운 김철수 추모비ⓒ부안21

선비사상에 기초한 독립운동

김철수는 전통유학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으로서 전통유학과 독립운동을 위한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한국사회주의 사상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역사자료를 남기면서 “고의적으로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안 하겠고 들은 말은 들은 대로 내가 책임지지 않을 말은 미리 얘기하겠다”고 역사 앞에서 진솔한 입장을 보여, 삶을 통해 민족의 고난에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의 역사에 대한 당당함을 읽을 수 있다.

1999년에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자료집이 출판되어 김철수의 사회주의 운동을 전통적인 유학의 선비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하였다. 지운의 가족은 흩어졌고, 아버지 때문에 험한 세상을 산 돈지에 살고 있는 지운의 딸은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가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억한다.

2004년 3월 16일 김철수의 18주기 기일에 백산중․고등학교 정문 옆에 ‘지운김철수 선생 추모사업회’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비와 꽃동산을 만들었다.

 

/정재철
2005·03·14 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