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통일을 시대의 아픔에서 꺼내다

 

▲고산 선생의 딸 지영, 혜영이 그린 ‘추억’ⓒ부안21

 

정진석(鄭振奭)은 1920년생으로 아버지 정익모(鄭益模), 어머니 유달천(柳達川)의 5남매 중 막내로 부안군 백산면 덕신리 임방마을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대의 기억

그의 자성록 『옳고 그름을 떠나서』에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초등학교 때 식량이 없어 아침을 굶고 학교에 간 배고픔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강의록으로 보통문관 시험 준비를 독학으로 하다가 선린학교 전수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유학의 꿈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보선상업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2차대전이 한창이었고 주로 영어공부와 책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경 입명관 대학 전문부 법정학과에 입학하여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다녔다.

이때 동경에서 조선인 학생 특별지원병 격려대강연회가 있어 가보니, 이광수, 최남선, 김연수 등이 학생들에게 일본을 위해 전선에 출정하라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정진석은 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 우리 조선 사람이 참전하여 싸우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해서 강제 징병을 거부했다.

▲고 고산 정진석 선생과 부인 이명환 여사ⓒ부안21
▲선생은 시골 백산 학원을 명문사학으로 성장시킨다.ⓒ부안21

해방 이후 좌익 활동

해방 이후 조선은 ‘친일파 청산’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시대의 과제가 있었다. 정진석은 이를 위해 고향 백산에서 청년동맹 활동을 시작했다. 10월에는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 부안군 지부가 조직되자 책임비서에 김용술, 정진석은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봄에 내변산 실상사에서 부안군당 1차 당 대회를 열어 책임비서에 김복수, 조직부장에 김태종이 선임되었다. 이때만 해도 사상 활동이 반합법적이었기에 모두가 희망과 활기가 가득하였다.

1947년 3월 22일 전국 24시간 총파업 투쟁이 있었다. 부안에서는 총파업을 확대하여 군민항쟁 형태를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면서 탄압과 테러의 구실을 주었고, 간부들은 대부분 몸을 피했다. 백산면에서는 정진석을 좌익진영의 대표로 낙인찍어 우익 테러단들이 집안 가구를 부수고 약탈해갔다.

정진석이 군산여상 교사로 근무하던 군산에는 1946년 겨울부터 서북청년들이 군정의 비호아래 갖가지 테러를 하면서 좌익청년단체와 노동단체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테러를 마친 서청의 강연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라는 교장의 지시를 정진석과 동료교사들은 거부했다. 테러단체의 강연에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어서이다. 그 후에 교장의 지시가 부당하다며 사표를 냈다.

▲독립 지사 고 지운 김철수 선생과…ⓒ부안21

▲보안 출신 비전향장기수 허영철 선생과…ⓒ부안21

시골 백산 학원을 명문사학으로

백산중학교 설립 기성회를 결성하여 1949년에 학교 인가를 받아 조재면이 명예교장으로 정진석은 교감이 된다. 학생들을 모집하여 운영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더 이상 교사의 역할 만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겼다.

부안에는 1950년 7월 20일에서 9월 28일까지 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정진석은 이 기간 동안에 군당 선전부 강사로 배치 받는다. 9.28일에는 인민군이 물러가고 인공에 관여한 사람들은 변산에 입산하여 산 생활을 시작했다. 입산 뒤 정진석의 역할은 조직부 책임지도원, 주산면책 지도위원, 백산면당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정진석은 강력한 폭력 투쟁이나 사람들을 살상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변산에서 1952년 4월에 생포된 후 남원포로수용소에서 두형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출소할 수 있었다. 출소 후에는 조용히 농사짓는 일에 열중하였다.

백산중학교에 1955년에 복귀했고 이 후에 동료들과 함께 학교를 현 위치로 이전하고 고등학교도 설립하여 진학 할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었다. 교사들과 함께하는 투명하고 따뜻한 학교 운영, 전주고등학교에 몇 차례 수석을 낸 실력 있는 지방 명문, 1977년의 배구단 창단과 전국대회 우승. 백산학원은 시골에 있지만 많은 인재를 길러냈고 부안을 대표하는 학교로 성장했다.

통일을 시대의 아픔에서 꺼내다

5공 때는 광주학살을 일으킨 군인들이 정치를 하던 때로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숨죽인 사회였다. 그때 향토사단에서 각 지역 학교를 방문해서 교사들을 상대로 안보교육을 하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이때 정진석은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 아니냐고 되물어서 이들의 교육을 거부했다. 2003년에 부안에 핵폐기장 문제가 터졌을 때, 반핵해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단식을 하는 문규현 신부를 자주 방문하여 대화했다.

비전향 장기수 40여명이 2000년 9월에 부안을 찾았을 때, 정진석은 이들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당신들이 30~40년 동안 감옥에서 목숨조차 위협받는 어려움을 겪은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온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이러한 솔직한 자기 고백은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과 믿음을 주었다. 장기수 허영철은 이런 정진석의 자세를 ‘의리와 솔직함’이 묻어 있다고 표현했다.

정진석은 통일에 관심이 컸다. 일제 시대와 해방 공간에서 이념 때문에 죽음을 넘나드는 모진 고통을 겪었고 분단 현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통일이 되어야 외세의존이나 분단 때문에 생긴 여러 모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통일이 역사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긋지긋한 외세에 의존하는 망국의 사대주의를 버리고 평화 통일을 바라는 힘을   집결시켜 일차적으로 남북평화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진하여야 한다. 나는 다 살았지   만 나의 자손, 아니 우리 민족의 후대들을 위하여 평화통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이 길만이 우리 7천만 겨레와 조국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자성록『옳고 그름을 떠   나서』‘내가 바라는 조국’에서)

그의 장례 길은 바람이 많았다. 꽃상여를 맨 백산중고 교사들의 상여소리, 뒤 따르는 학생들과 유족들. 선산에 하관하여 삽으로 흙을 뿌리던 막내 며느리는,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며 울먹였다.


▲9월 13일, 선생은 선생이 설립하시고 몸 바친 정든 백산학원 교정을 떠나셨다.ⓒ부안21


연 보

1920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오곡리 671번지(임방마을) 출생
1927~8 서당에서 한문수학
1938백산 보통학교 6학년 졸업
1939 선린상업학교 전수과 입학
1942 일본 동경 보선상업학교 5학년 졸업
1942 일본 동경 입명관대학 법정학과 입학, 한국인전문대생 특별지원병실시로 학업 중단
1943 귀향
1945 전북도회계과 근무
1945 9월 백산면 청년동맹참여
1945 10월 김복수 지도로 부안군 공산주의 청년동맹 결성
1946 9월 군산여자 상업학교 교사근무
1947년 10월 군포고령 위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선고. 건강악화로 귀가요양
1948 백산중학교 설립 기성회 발족, 총무부장 맡음
1949년 11월 재단법인 백산학원 및 사립 백산중학교 설립인가 동시에 교감취임
1950년 8월 부안군당 선전부 강사로 소환당함
1950년 10월 변산에서 입산 생활
1952년 4월 변산 덕성봉 비밀 트에서 피체
1952년 6월 석방 출소
1955년 2월 백산중학교 평교사 부임
1961년 2월 교장 취임
1966년 2월 백산고등학교 설립 교장 겸임
1986 지운 김철수 추모사업회조직, 추모사업회 회장 맡음
1989년 11월 백산학원 이사장 취임
1991년 9월 민선 초대 전북 도교육위원 피선
2003년 10월 백산학원 이사장 퇴임
2005년 9월 사망. 묘소는 백산면 오곡리 머우실 선산


/정재철
(기사작성 200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