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邊山)의 수난(受難)

 

▲검모포(현 진서면 구진마을)ⓒ부안21

 

원(元)나라의 일본 정벌 시 배를 건조한 변산

우리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보면 유사(有史)이래 수많은 타 민족의 침략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다. 이곳 영산(靈山)인 변산도 역사의 수난 속에서 온갖 시련과 희생을 겪어 왔으니 고려 시대로부터 6 .25동란까지의 수난을『부안 군지 1988』에 기록된 대강만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차로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는데 고려 원종(元宗15년 1274)년 원(元)나라는 일본 정벌(政伐)을 이유로 고려에 대소(大小) 전함 9백 척의 건조를 요구해 오는데 배(船)의 종류는 쾌속선(快速船) 3백 척, 몰수선(沒水船) 3백 척, 천석주(千石舟) 3백 척의 건조를 요구하고 원(元)나라는 총 감독관에 홍다구(洪茶丘) 를 파견하였다.

홍 다구라는 자는 원래 고려인으로 고려에 반역하고 원나라로 도망한 자의 자식으로 원나라에서 고위 관리직에 등용되어 조공 사신으로 고려에 여러 번 다녀간 인물로 고려에 대한 개인적 감정과 보복심으로 이유를 만들어 고려 왕실을 어렵게 하며 공을 세워 원나라에 충성을 보임으로써 사사로운 출세를 꾀하고자 고려에 조공의 실행을 독촉하고 부과된 배의 건조에 필요한 장인(匠人) 인부, 물자, 도구, 식량 등 모든 것을 고려에 부과시켜 엄중한 감독 아래 그 해 정월부터 주야(晝夜)를 막론하고 배의 건조 사업을 강행 독려한다.

이에 고려에서는 김 방경(金方慶)을 조선(造船) 건조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목수와 인부 250명을 모집하여 부안 변산(邊山)과 전남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조선소 두 곳을 설치하여 주야로 강행군하여 그 해 6월에 3백 척을 건조하여 모든 전함은 김해(金海) 앞 바다로 수송하게 하고 또다시 원나라는 고려에 병사 8천명 수부(水夫) 1만 5천명의 병력을 더 요구한다.

그러나 고려는 그 요구는 너무 과다하여 응할 수 없다고 교섭한 결과 병사 6천명, 수부 7백명으로 줄여서 조공하게 된다. 그 당시 고려의 문신 이규보가 변산에 벌목사로 파견되어 변산 소나무로 배를 건조하면서 변산과 깊은 인연을 갖는 계기가 된다.

그 당시 배를 건조한 장소의 기록은 없는데 여러 가지 부안의 지리적 조건을 고려해 볼 때 변산에서 접근이 가장 용이한 곰소(熊沼)항 근처나 구진 마을(鎭西面) 쯤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몽고는 고려를 짓밟은 다음 일본을 치기 위해 장흥의 천관산과 변산에서 배를 만들게 했다. 그렇다면 변산 어디에서 만들었단 말인가? 향토사학자들은 바로 이 구진마을로 비정하고 있다. 실제로, 육이오 후에 마을 앞 갯벌에 무수하게 묻혀 있는 통나무를 캐내 썼다고 한다. 통나무는 1.5미터 깊이에 묻혀 있었는데, 조선소의 도크처럼 넓게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한다. 그 때 쓰고 남은 나무 한 토막이 구진마을 고샅에 나뒹굴고 있다.ⓒ부안21

어쨌든 이규보는 변산에서 작목사(斫木使)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변산 절경(絶景)에 매료되어 변산을 애찬(愛贊)하는 그의 주옥(珠玉)같은 많은 시 작품(詩作品)을 남기게 되었으며 그 후 그는 고려의 평장사로 지내다가 정란(政亂)에 휘말려 귀향을 오게 되는데 마침 유배지가 부안 위도 상왕등도 이었기에 다시 부안과 인연을 갖게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위도면에 관행(官行)이 인천 이씨 성(姓)을 가진 주민이 있다면 혹 이규보의 후손(後孫)은 아닐 런지…?

원(元)나라의 일본 정벌 시 배를 건조해 준 변산은 그 이유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왜구들의 보복 침략과 약탈이 심하였는데 특히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왜구들과 현 상서면 감교리 청등벌 전투, 변산의 길목인 호벌치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이 지방 의병들이 전사하고 변산의 많은 사찰들이 불타고 월명암도 소실되었으며 전화(戰禍)와 고난이 호남의 다른 지역보다 심하였음을 보여준다. 보안면 유정자 호벌치에 귀(耳)무덤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다시 나라가 일본에 침략 당한 후 1929년에는 1만 정보가 넘은 변산의 임야가 일본 귀족원(貴族院) 다까도리라는 개인 한사람에게 일금 2십만 원에 불하되어 개인 사무소와 청원 경찰을 두고 1942년 소위 대동아 전쟁을 위한 국가 재물 총 동원 법을 근거한 임목 벌채 동원령을 발동하여 수많은 수목을 무차별 난벌해 버리는 쓰라린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그런 대로 깊은 계곡인 중계, 청림, 월명암 주변에 간간이 조금 남아 있던 나무들마저 마치 일본놈(다까도리)들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되었던지 무차별 난벌과 도벌이 극심하였고 특히 6. 25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에는 변산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군부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체벌하는 중에 사복을 채운 사람들도 부안에 있었다니 가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런 대로 국가가 안정되고 1966년 산림법이 강화되었으며 생활의 연료가 화석연료. 석유 가스로 대체되면서 변산도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서 오늘도 월명산우회(月明山友會) 회원들과 ‘변산을 사랑한다는 우리는 할 일이 무엇일까?’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방안을 고민하면서 세제(鳥嶺)를 넘어 부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을 찾아간다.

/김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