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안(仙溪岸) 이야기

 

▲선계폭포ⓒ부안21

첫 번째 이야기 ‘진표율사와 선계안’

보안면 우동리 뒤 굴바위 앞 현재 우동리 저수지의 안쪽을 선계안 또는 성계골이라 한다. 일찍이 「삼국유사 권지4권에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편을 보면 진표는 금산사 숭제법사에게 “얼마나 수행을 해야 계율을 얻을수 있나이까” 하고 물으니 숭제법사는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이 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명심하고 변산 선계안에 들어가 3×7일을 수행하였으나 깨달음이 없자 다시 옥녀봉을 지나 변산 부사의방에 도착하여 행장을 풀고 3업을 닦는데 자신의 육신을 학대하는 망신참법으로 마침내 점찰계율과 신표간자 189쪽패를 얻었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한다.

두 번째 이야기 ‘이성계와 선계안, 성계골’

일찍이 구전되는 이야기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청년시절에 큰 뜻을 품고 팔도를 두루 답사하면서 지리도 익히고 백성들의 민심도 살피다 부안의 변산 선계안에 발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니 이러한 영산에는 도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선계안에 암자를 짓고 공부하기 시작 하였을 때,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두 노인이 암자를 찾아 왔다.

청년 이성계는 범상하지 않은 두 노인을 맞아 극진한 대접을 하였더니 두 노인이 말하기를 “우리는 유산하는 사람으로 이곳을 지나다 잠시 들렸소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언행이나 몸가짐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한 이성계는 노인들에게 文과 武에 대하여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막힘이 없는 현답을 강론하니 이성계는 두 노인께 큰절을 하고 스승이 되어줄 것을 간곡히 간청하였다.

두 노인은 처음에는 한사코 사양하더니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에 감복하여 쾌히 승낙하고 사제의 의(義)를 맺고 두 노인은 선계안에 묵으면서 이성계의 스승이 되어 한 분은 문(文)을 또 한 분은 무(武)를 가르쳤는데 이성계의 문무는 일취월장하여 훌륭한 청년이 되었다.

하루는 두 노인이 이성계를 불러 앉히고 “이제 우리는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그대는 이제 세상에 나아가 그대가 생각하는 큰 뜻을  펴고 성취하라” 이르니, 이성계는 스승의 은혜에 깊이 사례하고 작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사제의 정이 어쩌나 깊었던지 서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은 것이 선계안으로부터 북쪽으로 삼천 보나 떨어진 어느 봉우리까지 오게 되었다.

두 노인은 이성계를 돌아보며 이만 돌아가라 일렀다. 어쩔 수 없이 스승께 하직의 절을 하고 보니 두 노 스승은 간 곳이 없고 그 앞에 높은 봉우리 두 개가 우뚝 솟아올랐는데 이로부터 이 두 봉우리를 쌍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지금도 선계안에는 이성계가 공부했다는 암자자리에 주춧돌이 남아 있고 그가 심었다고 전해 오는 대밭이 있으며 활 쏘고 말달리며 무예를 닦았다는 석벽과 반석이 있고 그 아래로는 선계폭포가 흐르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정사암과 허균, 그리고 홍길동전’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 선계안 골짜기가 있었다. 그 고을 출신 부사(府思) 김공청(金公淸)이 자리를 잡아 별장을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즐기며 쉴 곳을  준비해 둔 것이었다.

허균은 예전에도 호남의 과거를 주재할 때나 해운판관이 되어 조세를 거둬들일 때 여러 차례 다니면서 정사암 주위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아직 구경해본 적은 없었다.

마침 공주목사(公州牧使)에서 파직(1608년8월)되어 산골짜기에 들어가 여생을 살리라 생각하던 중 예전에 매창과 사귀면서 벼슬을 떠난 후엔 변산에서 자연에 묻혀 살겠다는 약속을 한 일도 있고, 또 처가 쪽으로 가까운 부안 현감 심광세(沈光世)가 있기도 하여 마음을 정하려던 차에 김공청의 아들이 나에게 찾아와 나의 처지를 위로하기 위함으로 “아버님께서 마련하신 정사암을 공께서 조금 수리하시고 그 곳에서 지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권하기에 나는 이 말을 듣고 기쁘고 고마워서 즉시 고달부(高達夫)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니 시냇물이 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흐르고 우거진 숲 덤불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늙은 당산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이란 곳에 이르니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고 천척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시냇물을 마시고 연못가 돌 위에 걸터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가을꽃이 피기 시작했고 단풍잎들은 반쯤 물들어 있었고 저녁노을은 서산에 걸리고 하늘 그림자는 물위에 드리워졌다. 물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한 수 읊고 나니 속세를 벗어나 마치 안기생(安期生) 선문자(箲門子) 같은 신선들과 함께 삼신산에 들어와 노니는 것 같았다.

홍길동전은 선조 39년에 일어난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에서 억울하게 죽은 서자들의 꿈과 정의사회를 위한 의적들의 활동을 적고 있는데 그때 사회에 대한 허균의 저항정신이 짙게 반영된 사회제도 개선의 선구자적 작품이다.

허균의 스승은 서자 출신인 이달(李達)이었는데, 이달로부터 글을 배우면서 그 당시 반상의 계급과 가혹한 적서(嫡庶)의 차별과 사회제도의 모순 그러한 현실을 깨뜨려 보겠다는 이달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아 훗날 부안의 변산반도를 무대로 한 홍길동전이 이곳 정사암에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시기를 대략 1612년경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즉 이 시기 허균은 큰형인 성이 죽은(1612년 8월 9일)후, ‘칠서의 옥’과 ‘기축옥사’가 일어났던 1613년까지 부안의 우반동 정사암에 칩거했던 것이다.

그 무렵의 허균의 발자취를 더 자세히 더듬어 보면. 허균이 부안에 와 이매창과 만난 때는 1601년 7월 23일이었다. 그 후, 1604년 수안 군수에 부임되었다가 곧 파직되고, 1607년 3월에 삼척부사 부임 5월만에 파직, 그런 허균은 1607년 12월 9일 또 다시 공주 목사로 등용되었다가, 1608년 8월에 다시 공주목사직에서 파직 당하는데, 당시 부안 현령으로 있던 심광세는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부안의 주을래리(줄포) 부근에 전답을 마련해 주었고, 허균은 부안의 보안 우반동 정사암에 와 쉬었다.

그 후로도 허균은 1610년 10월에는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지만 곧 취소되고, 11월 전시 대독관이 되었으나 조카들을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그해 12월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된다. 이때(1611년 4월 23일)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리자 부안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허균은 이 시기에 우반동 정사암에 칩거하며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것 아닐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간직한 곳이 바로 선계안이기에 정리하며 한 곡을 불러 보았다.

선계안(仙溪岸)에서

아득한 천고(千古)에 이름난 도솔천
상서로운 영기(靈氣) 운집한 도원
하늘과 맞닿아 선계(仙溪)였구나

만첩(萬疊)변산 무진무애(霧津霧靄) 발아래 서해 바다
방장산(方丈山) 굽어보니 백운(白雲)마저 한가롭고
웅연조대(熊淵照臺) 돗단배는 칠산으로 흘러간다

울울한 노송 숲엔 청풍명월(淸風明月) 깃들었고
잠용(潛龍)은 영지(影池)못에 승천(昇天)을 기다리니
대각(大覺)한 선인(仙人)들이 찾을 법도 하였구나!

세상 만사 백팔번뇌(百八煩惱) 진표율사는
망신참선(亡身參禪) 신표간자 부사의암(不思議菴)에
지장보살 다람쥐랑 머무시는가?

현인(賢人)들게 문무지혜(文武智慧) 가히 깨친 후
쌍선봉 다녀오신 이 태조(李太祖)님은
오 백년 나랏일로 출타하셨나?

정사암(靜思菴) 마주앉아 부일배(復一杯) 하던
허 선비(許筠) 이매창(梅窓)은 세오영(洗汚纓)한 후
무량정토(無量淨土) 율도국(硉島國)찾아 가셨나?

현인(賢人) 떠난 정요한 선계영산(仙溪瀛山)은
해진 녁 산비둘기 둥지 찾아 날아간 후
죽장(竹杖)에 외로운 나그네 재를 넘었소.

웅연조대(熊淵照臺) 어선들이 밝혀 대는 야등 불빛이 어리는  서해 바다의 전경
잠  용(潛龍) 용이 숨어 있다
영지(影池)그림자가 맑게 비치는 연못
망신참선(亡身參禪)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도를 구 하는 선법
불사의암(不思議菴) 일반적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기적적인 일이 이루어 졌다는 암자
무량정토(無量淨土) 생사병노아(生老病死餓) 가 없는 세상
부일배(復一杯) 한잔 한잔 또 한잔
세오영(洗汚纓) 세상의 더러운 떼가 낀 모자와 머리를 씻는다
율도국(硉島國)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국가
영주설산(瀛洲雪山) 눈이 가득히 내린 변산반도

※안기생(安期生)=진대(秦代)낭사부현 사람 바닷가에서 약을 팔며 하상장인(河上丈人)에게 배워 장수(長壽) 하였음으로 천세옹(千歲翁) 이  라 일컫는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갔을 때 삼일 밤낮을 지새우며 이야기하고 금옥(金玉)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고 서(書) 적옥석(赤玉舃)을 남기고 수 십년 후 나를 봉래산에서 찾으라 하고 떠났다. 후일 시황은 사람을 보내 그를 해중에서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부향정변(埠鄕亭邊) 수십처(數拾處)에 사당(祠堂)을 세워 기리었다 한다.

※선문자(箲門子)= 안기생과 동시대 사람으로 비슷한 사람.


/김길중
2005·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