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름다운 변산(邊山)

 

▲월명무애ⓒ부안21

 

노령산맥이 서해를 향해 달리다 한가닥 던져놓은 산뭉치

간혹 타지역(他地域)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안(扶安)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변산(邊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변산(邊山)은 부안(扶安)의 대명사이며 부안을 대변하는 지명이다. 부안(扶安)의 역사(歷史)나, 문화(文化), 생활(生活)의 터전이 변산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未來)의 부안까지도 변산(邊山)은 밖변산인 해변과 더불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것이다.

이러한 변산반도는 태고(太古)에 한반도(韓半島) 남, 서쪽을 내려 뻗고 있는 노령산맥(蘆嶺山脈)이 어쩌다가 저 넓은 호남평야(胡南平野)를 훌쩍 뛰어 넘어 서해를 향해 한 뭉치 던져 놓은 기묘한 형국으로 남, 서, 북은 모두 바다로 둘려 쌓여 있으며, 깊고 울창한 삼림(森林),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수많은 절경(絶景)과 명승고적(名勝古蹟)들이며, 또한 연연히 이어지는 가지가지의 전설(傳說)과 역사의 향기를 간직한 채 신선(神仙)들이나 살 만한 월태화용(月態花容)의 기령(氣嶺)만으로도 부족하였던지 여기저기 바다에 던져 놓은 점점(點點)한 섬(島)들과 간간이 펼쳐 놓은 은빛 모래 해수욕장, 날마다 연출되는 서해 바다의 독특한 황혼마저 아름다운 변산도원(邊山桃園)을 신령한 조물주는 참으로 마음먹고 만들어 낸 특출한 창작품이라 찬(燦)하지 않을 수 없다.

종종 기회가 있어 이름난 다른 고장의 명승지(名勝地)나 공원들을 기대를 가지고 돌아다녀 보면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중 어느 한쪽의 관광꺼리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꾸미고 만들고 보태어 상업적 효용성의 볼거리에 식상한 경험에 비하면, 이곳 변산은 산(山)의 기경과 들(野)의 풍만함, 석양녁 황혼 빛에 물든 찬연한 바다(海)의 웅장한 비경까지를 겸하였음에도 차마 앞서지 않는 겸양의 함조롬으로 조화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해륙야(海陸野)의 종합공원으로 어울려진 명지의 승지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산반도는 부안군의 서북(西北)부에 위치한 <변산면, 진서면, 보안면, 상서면, 하서면>등 5개면에 걸친 산악 일대와 인근 해안선을 포괄하고 있었는데 새로이 조성되는 새만금방조제공사로 인하여 그 좋은 해안선(海岸線) 일부를 잃게 됨은 참으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금산성-주류성으로 비정되고 있다.ⓒ부안21

 

변산의 유래

「삼국유사」에 ‘백제지유변산고운변한'(百濟地有卞山故云卞韓)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뜻을 풀어 보면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라는 산이 있어 변한(卞韓)이라 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부안의 변산(邊山)은 원래 변산(卞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삼한 중의 하나인 변한(卞韓)의 이름은 이 변산(卞山)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개암사(開岩寺) 자리가 이 변한(卞韓)의 궁궐터로 변한이란 부족국이 백제(百濟)에 통합되고 난 후 궁궐을 개암사 절(寺)로 바꿨다는 전설이 전한다.

개암사지「開岩寺誌」에서의 변산은 마한(馬韓)의 효왕(孝王) 28년에 변한 주(卞韓主)가 진한, 마한(馬韓)의 난(亂)을 피하여 이곳 변산에 우(禹)장군과 진(陳)장군을 보내어 도성(주류산성 추정)을 쌓게 하고 마한 원왕(元王) 20년 임오(任午)년에 변한의 주(主)가 죽고, 다음 부장 마연(馬延)이 주(主)가 되어 변산으로 이도(移都)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된 것을 고찰해 보면 변산은 보안현(縣)에 있으며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 인데 능가산(愣伽山)으로 불리고 영주산(瀛洲山)이라고도 하며 봉래산(蓬萊山) 혹은 변산(卞山)이라고 하는데 말(語)이 떠돌아다니다가 언제부터 변산(邊山)으로 되었다 한다. 변한(卞韓)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하나 그러한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이처럼 역사 깊은 변산반도가 아침 연화(蓮花)같은 운무(雲霧)에 쌓인 봉우리들이 백여리를 빙 둘러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쌓이고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나라의 궁실(宮室)과 배(船)의 재목은 고려 시대부터 모두 여기에서 얻어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짐승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여 주었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은 곳이다.’ 라고 하였다.

또 고려(元宗)시대 변산에 벌목사(伐木使)로 다녀간 이규보(李奎報)의 기록을 빌리면 ‘변산은 나라 제목의 부고(府庫)이다. 소(沼)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고 층층한 산봉우리와 겹,겹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굽어지고 퍼져서 그 머리와 끝이 옆구리와 옆구리에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산 아래는 푸른 바다로 어울러져 가히 명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 이중환(李重換1690~1750)의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된 ‘변산은 노령 산맥 한 줄기가 서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바다를 밀치며 자리한 곳이 변산이며, 남, 서, 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며 평탄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낙낙 장송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 해를 가리었고 골 밖 백성들은 모두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굽고 또는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들이며, 산중에는 기름진 땅이 많으며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業)으로 하므로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며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하다. 다만 샘물에 장기(瘴氣)가 있는 것이 유감이며 여러 산중에 큰 산(山)은 마을이 될 만도 하고 작은 것은 고인(高人)과 은사(隱士)가 지낼 만한 곳이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때 당시의 부안 지세(地勢)와 백성들의 삶과 민심(民心)까지를 잘 표현하여 기록한 듯 하다.

조선시대 풍수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긴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조선의 십승지지(十勝之地)론에서 이곳 변산을 네 번째의 십승지(十勝地)로 지목한 바 있으며, 「한국의 풍수지리」의 저작자인 최창조(崔昌曺) 박사는 이곳 변산의 굴바위(호암굴虎菴屈)를 십승지(十勝地)로 지적한 바 있다.

/김길중